좋은 사람들 - 세상의 좋은 이야기들을 모은 곳
그러니까 35세면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고 살기에 바빠서 애틋한 사랑을 다시 체험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 노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첫눈이 내릴 때 서울 동쪽 지붕이 없는 노천역에서 젊은이들 둘이 서 있는 걸 보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글을 썼습니다. [영산]이라든가 [밤눈] 같은 작품은 제 경우에 개인적인 내면의 토로라고도 할 수 있겠고, 영상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동네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꼬마들
미끄럼타기 바쁘다
미끄럼틀 계단을 종종종종 올라가
쭈룩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 엉덩이가 해지도록
미끄럼탄다
너희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머나먼 알프스 높고 높은 마터호른
근처까지 올라와서
눈부시게 하얀 빙하의 벌판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세상 곳곳에서 몰려든 스키어들
개미보다도 훨씬 작아 보이는
형형색색 장난꾸러기들
솟아오른 아버지의 드넓은 가슴팍에서
흐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겨드랑이에서
가파른 눈언덕 아래로
겁도 없이 미끄럼탄다
당신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요
묻지 않는다
-[미끄럼] 전문
우리가 어렸을 때 미끄럼을 탄 기억이 있고 또 스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눈이 오기만 하면 스키를 타러 열악한 교통 상황을 가리지 않고 스키장을 찾으러 갈 겁니다. 그런데 미끄러져 내려온다는 자체는 인간의 유희 본능이라고 볼 수 있지 거기에 공리적 목적을 문제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건강에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반드시 공리적으로 이로운 것은 아니지요. 그냥 목적 없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진지할 정도의 무목적성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은 미끄럼을 타고 어른들은 스키를 탑니다.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도덕의 무목적성까지 갈파한 적이 있으니까, 이것도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목적성을 얘기할 때, 아마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는 무목적성의 무구한 유희 본능으로부터>
우리의 삶과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서의 유희 본능이 미끄럼 같은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미끄럼을 타고 스키를 타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타고난 천진성을 예술적 천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혼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작은 사내들] 전문
1970년대 후반에 쓴 거니까 초기작에 속하는 것이고, 돌이켜 보면 사반세기의 나이를 먹은 작품입니다. 기술 문명과 산업사회 발달과 반비례해서 인간이 소외되고 왜소화되어 가는 현상을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이른바 새로운 경제체제, 신경제주의의 등장과 함께 자본의 힘만 자꾸 커져가고 세계화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인간이 점점 더 왜소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자본과 돈이 또는 부자가 이 세상의 20%를 차지하고 소외된 인간들이 80%를 점유하게 되는 세상이 온다고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로 국경이 전부 사라진 대신, 새로운 범세계적인 계급, 빈부로 양분되는 세계적인 양상이 나타나지 않나 걱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없어지고 말 것인가, 무(無)로 환원되고 말 것인가. 아마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자본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새로운 변혁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우리가 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다만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는 데서 이 시는 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제가 사회적 관심이라고 할까 하는 것을 드러낸 시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우리의 노동절이었던 3월 1일이었던 시절에 쓴 시입니다.
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리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노동절] 전문
노동절 하루 비어 있는 주차장을 보면서, 모든 사물에게는 자기 기능과 이름이 있기 마련인데 이 주차장 같은 경우는 인간이 그 땅의 기능과 이름을 빼앗아 간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유용성, 환금성에 의해서 사물의 본래의 기능을 소외시켜 버린 것입니다. 사실 주차장은 시멘트로 덮여 있을 수도 있고 그냥 흙으로 된 땅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땅과 흙이라는 것이 작게는 아주 미세한 박테리아나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궁전도 거기에다 세울 수 있는 삶의 터전인데, 그 삶의 터전을 순수한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수탈하고 자연의 기쁨을 왜곡한 자본주의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단 주차장뿐만 아니라 우리가 제 이름을 돌려주고 제 기능을 찾게 해줘야 할 것은 이 세상에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여기에 포함되겠지요.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자본과 자본 아닌 것 중에,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하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20;80의 비율을, 세계적인 부를 이룬 어느 투자자는 황금 분할이라 했지요.
이 비율이 허물어지면, 가진자는 행세를 못하니, 기어코 지켜야하는 모든 방법이 동원한다 합니다.
정부를 움직여 법을 고치고, 제도를 바꾸어야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를 하면서요.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구조적인 틀을 깨기위하여 예술이 존재한다고도 했습니다.
또,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에서도 맥락을 같이하는 이론을 발견할 수도 있구요.
"무목적성의 무구한 유희 본능"이라는 명제에는, 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이 공감을 하여 오고 있지만
어차피 인간의 본성이, 틀에서 얽메이는 걸 싫어하는 속성이라, 영혼과 육체의 자유, 그자체를 십분 발휘하여
우리가 경계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많은 현상들을 원초적으로 불능이게하여야 하는 사명도 있다하겠지요.
또, 창작의 궁극적 목적은
태어날 때의 그 순수를 일깨우고, 그리로 돌아가는 매개체(예술)라고 했듯이,
절망에는 용기와 열정을, 슬픔에는 위로와 기쁨을, 도전에는 정열과 비전을, 강제하지 않고 따르게 하는
영혼의 씨앗으로, 그 공감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나은 삶의 질에의 변혁을 기대하면서요~
그러니 창작은, 삶 그자체에 대한 노래이고 눈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50여년 이상을 옹기를 굽는 장인 앞에서,
가마터 근처에도 가보지 아니한 사람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토기를 굽는 애환을 노래한들,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두번째 답글이 힘드네요~
또, 치통 핑계를 대야 하나~?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