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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보자면 사람이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과 나의 고귀하고 뼈저린 사랑조차 그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몰입했던 사랑이 행위들이 고작 “섬유질이 지방에 입 맞추고, 세포와 조직을 부벼 춤을 춘” (최영미의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사랑에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너무 허망할까요?

 

물안개를 피워 올려 허공을 에테르처럼 마취시키고 있는 금광호수를 바라보며 간밤의 어지러운 꿈들을 추슬러봅니다.
맨발에 슬리퍼를 끼고 시린지도 모른 채 차가운 뜰에 한참 서서 저 겨울 아침의 풍경에 눈길을 꽂고 사람이란 게 뭐냐, 사는 게 뭐냐 따위의, 금비를 듬뿍 주어 웃자란 고춧대처럼 이런저런 무성한 생각을 궁글려보는 것이지요.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36년 미국 일리노이 주(州)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주(州) 롱비치에서 자라난 평범한 사람.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해 비행사가 되고 공군조종사가 된 지 스무 달 만에 그만두었지요.
비행잡지의 편집자가 되었지만 잡지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그도 그만두고 3달러씩 받고 관광객을 고물비행기에 태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런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그가 노트에 제 꿈과 상상을 버무려 글을 하나 써냈습니다. 그런데 끝이 맘에 들지 않아 무려 8년 동안이나 마무리를 미루고 팽개쳐두었습니다.


막상 원고가 완성돼 출판사에 보냈더니 반송돼 왔습니다. 출판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기가 생겨 계속 보냈습니다. 그렇게 열여덟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원고.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책은 나왔지요.

무명작가가 처음으로 써낸 이 책은 먼저 히피들 사이에서 노트에 베껴 쓰는 방식으로 읽혔습니다.


그러다가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나중에 전 세계에서 무려 700만부나 팔렸습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고요. 그는 이 책에서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겼지요.
누군지 알겠지요? 바로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의 얘기입니다.

 

사람이 그냥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덩어리가 아닌 것은 입지를 세우고 보이지 않는 꿈을 키워가며 누군가를 고귀하게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비루하고 세상은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희망 없는 날들도 있지요. 집으로 날아드는 우편물이란 연체된 카드사용액 독촉장, 고지서들, 실직, 실연, 내게서 등 돌리는 사회와 사람들, 포기해버린 꿈들, 냉장고를 열어보면 말라비틀어진 귤 몇 개, 언제 사다 넣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상해버린 우유, 뚜껑이 열린 채 변색돼버린 참치 캔.
뭐, 이쯤 되면 나를 사로잡는 건 수치심, 절망, 분노, 지독한 자기연민, 슬픔, 혼돈들이겠지요.

 

그래도 꿈은 잃지 말아야겠지요.
대나무는 일생에 단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뿌리가 한데 엉켜 군집을 이루며 뻗어가는 대나무에 꽃이 피면 머지않아 대나무들은 시들어 죽는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태어났다면 뭔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소명 같은 게 있을 겁니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대나무가 단 한 번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우리에게도 피워야 할 꿈이 있겠지요.
때때로 그게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꿈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글 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 뿌리와 이파리) 中에서..

 


배경음악 : El Vals / Eleni Karaindr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