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샘터 - 팍팍한 삶, 잠시 쉬어 가는 공간
글 수 494
황혼의 길 위에 그가 서 있다. 황혼이 그를 길 위에 세워놓았다. 황혼은 서 있는 그의 발아래 놓인 길 위로 붉은빛 주단을 깔아놓았다.
같은 내용의 글을 문장을 바꿔 써본다. 평범한 문장을 시적 문장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시도이다.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다 보면 문장은 금방 색깔 있는 풍경이 되어 마음속 캔버스를 채운다. 음악을 들으며 “색채감이 풍부한 곡이야”라고 감탄하듯 책을 읽으면 책 속 문장에서 색채감을 느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심지어 후각으로 느껴지는 것에도 색깔이 있다. 음악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이 있으니 작곡가별로 분류한다면 아마 120가지 색깔로 된 파버카스텔의 색연필 개수보다 많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한 작곡가를 떠올리면 따라 나오는 색깔일 뿐 음표 하나하나, 멜로디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지고 있는 색과는 다르다. 소리뿐 아니라 향기에도 은색이 있는가 하면 금색이 있고, 진한 보라색이 있는가 하면 밝은 보라색이 있다. 활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인쇄된 점은 활자가 검은색 아니 다른 색깔로 보인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색이 보인다는 말은 검은색 외에 다른 색이 이중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정한 글자가 연상시키는 특정한 색이 있다는 뜻이다. 공감각(syneschesia)이라 부르는 이중적, 또는 다중적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물지만 사람 중엔 여러 가지 감각을 겹쳐서 느끼는 이도 있다.
쇼팽도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쇼팽의 피아노곡을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에 빠진다. 쇼팽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개성 강한 그림을 전시하는 갤러리에 온 듯 유난히 색에 민감해지는 것은 그의 음악이 그만큼 색채감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캔버스에 칠하려고 짜둔 물감이 팔레트를 떠나 악보 위로 날아오르듯 쇼팽의 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 위로 색을 입힌다.
쇼팽 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쇼팽의 심장 이야기이다. 아마도 그의 심장을 색으로 표현하면 마젠타색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길게 덧칠한 마젠타가 온전히 마른 뒤 표현되는 색이 내 눈에 떠오르는 그의 심장 색깔이다. 붉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랏빛이라고 할 수도 없는 푸른빛 감도는 마젠타색은 진하거나 연한 보라와 함께 그의 음악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색이다. 그뿐 아니다. 쇼팽의 음악에서 내가 감지하는 색은 윤기 나는 경주마의 빛깔을 닮은 짙은 초콜릿색도 있다. 울트라 마린블루나 민트색 또한 그의 에튀드나 녹턴 같은 피아노곡에서 종종 발견되는 색이다.
“색은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라고 말한 이는 현대 추상미술의 문을 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아내 니나 칸딘스키이다. 작곡가 쇤베르크의 음악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의 아내답게 그녀는 “색은 피아노 건반이며, 눈을 피아노의 현을 때리는 망치이고,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라고 표현했다. 쇼팽의 심장 또한 나나 칸딘스키식으로 말하며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일 것이다. 영혼의 소리를 내는 그 피아노가 쇼팽의 고향인 바르샤바의 한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된 것이다.
그의 심장이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순간 나는 짜릿한 감동이 온몸을 훑고 가는 것을 느꼈다. 학창 시절 음악 교과서에서나 일던 신화 같은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확인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사실이 내 몸에 전기를 흐르게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톨릭의 성인 프란체스코가 생을 마감한 성당인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정원의 장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감동 비슷한 것이었다. 성 프란체스코가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가시덤불 위로 몸을 던진 이후 지금까지 이 성당 정원의 장미엔 가시가 없다는 것이다.
고향인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쇼팽은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심장을 바르샤바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몸은 파리에 묻히고, 심장만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쇼팽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독립을 위해 일어나 폴란드의 혁명을 러시아가 진압했기 때문이다. 고향 소식을 듣고 쇼팽은 아마 절망과 함께 러시아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느꼈을 것이다.
폴란드에게 러시아는 코로나19보다 극악한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다.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큰지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하러 나설 당시 90만이라는 대군 중 7분의 1이 폴란드인이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폴란드 정부는 독일에서 철수하는 미군 병력의 일부를 자국에 주둔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폴란드의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는 러시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1975년부터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나라가 분할 통치된 쓰라린 역사가 있다. 한동안 세계지도에서 사라져야 했던 그 어두운 시기에 태어난 쇼팽은 20세가 되도록 바르샤바에서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나라를 되찾은 폴란드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다시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은 폴란드 문화를 말살하고 숱한 지식인을 살해했는데,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 지식인 2만여 명을 집단 살해한 ‘카틴 숲의 학살 사건’이 대표적 만행이다. 그 사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은 아마 일본에 대한 우리의 증오심 못지않을 것이다. 나 또한 식민지 시절 고학을 하며 도쿄에서 공부한 선친이 입버릇처럼 되뇌던 "왜놈들은 나쁜 놈들이다"라는 말을 잊지 못한다. 귀국 후 무술 고단자이던 선친은 결국 주먹으로 일본인들을 때려눕힌 뒤 북간도로 피신해 해방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쇼팽의 심장이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폴란드인 친구한테서 처음 들었다. 이때 '처음'이라는 말은 어릴 적 피상적으로 알았던 쇼팽에 대한 상식적 앎이 강한 현실감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는 의미이다. 그건 아마 폴란드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한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한 그 친구는 지금 고향 폴란드가 아닌 런던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색채 전문가인 그는 한국에서 강의할 당시 학생들을 내가 있던 공간에 모아놓고 수업하기도 했는데, 인상적인 일은 강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까지 수업에 참여시켜 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할 만큼 수업 분위기가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시인도 예술가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악기를 이용해 연주하는 것도 아닌 시인을 과연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내 안에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다소 엉뚱하지만, "재진, 너는 예술가다"였다. 시인이 아니라 재진이라는 이름을 강조한 것은 아마 그와 나의 우정에 대한 신뢰나 친밀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곰이 출몰한다는 폴란드의 숲 이야기를 하던 그 또한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그가 얼마나 러시아를 싫어하는지를 나는 어느 날 베이징에 갔다 온다며 서울을 떠난 그가 예정보다 훨씬 일찍, 그러니까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돌아온 사건이 있고 나서 알게 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풍겨오는 공산주의 냄새가 싫어 일정을 취소하고 와버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듯 그는 코를 손으로 쥐며 고개를 내저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공산주의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의 아버지가 폴란드 독립 영웅이라는 사실과 그 아버지의 일대기를 영화감독인 사촌 형이 영화로 제작한다는 사연을 들은 뒤였다. 예민한 그의 오감이 공산독재 정권이 풍기는 냄새를 본능적으로 탐지하고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만나면 그와 나는 마구 떠들어댔다. 그는 영어나 폴란드어로, 나는 콩글리시와 한국어로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언어가 다르면서도 서로 통하는 걸 보면 그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동갑내기여서 통하는 게 있는 건지, 단어 하나만 듣고서도 우린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청국장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그를 내가 우리말을 잘 아는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듯 그 또한 내가 영어나 폴란드어를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면 다 통한다.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 이가 옥타비오 파스였던가, 누구였던가.
그의 고향인 폴란드로 날아가 2시간을 걸어도 끝이 안 보인다는 숲을 걷고, 숲속 동물들에 대한 동화를 쓰며 산다는 그의 누이를 만나보고 싶다. 그런데 성 십자가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된 쇼팽의 심장을 참배하기 위해 그와 함께 바르샤바로 갈 날이 내 인생에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세상은 바이러스에 의해 차단되고, 하루하루 그와 나는 노년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카톡으로 날아온 그의 사진을 보니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
옷깃의 주름은 다리미로 펼 수 있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펼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을 주름지게 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달력 속의 숫자일 뿐, 숫자는 노쇠를 겪는 인생이란 드라마의 소품으로 쓰다가 버릴 것이다. 나이보다 마음을 주름지게 하는 것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이다. 모르는 척하려 해도 이별은 언제 나 슬프다. 슬픈 이별을 기쁜 이별로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없다'이다. 기쁜 이별은 없으며, 기쁜 주름살도 없다.
소멸하는 것은 결코 기쁜 것이 아니다. 기쁘다고 우기지 말자. 소멸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슬픈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슬픈 것과 나쁜 것은 다르다. 러시아에 유린당한 약소국가 폴란드의 운명은 슬펐지만, 쇼팽의 인생이 슬펐던 것은 아니다. 그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갔는지 그가 남긴 마주르카나 녹턴, 프렐류드나 즉흥곡들을 들으며 우리는 예술이 슬픔보다 수명이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찾아온 슬픔을 문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슬픔은 힘이 세다. 우리는 슬픔을 망각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쇼팽의 피아노곡을 잘 치기 위해 건반을 연습하듯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연습할 수 있을 뿐이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
같은 내용의 글을 문장을 바꿔 써본다. 평범한 문장을 시적 문장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시도이다.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다 보면 문장은 금방 색깔 있는 풍경이 되어 마음속 캔버스를 채운다. 음악을 들으며 “색채감이 풍부한 곡이야”라고 감탄하듯 책을 읽으면 책 속 문장에서 색채감을 느낀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심지어 후각으로 느껴지는 것에도 색깔이 있다. 음악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이 있으니 작곡가별로 분류한다면 아마 120가지 색깔로 된 파버카스텔의 색연필 개수보다 많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한 작곡가를 떠올리면 따라 나오는 색깔일 뿐 음표 하나하나, 멜로디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지고 있는 색과는 다르다. 소리뿐 아니라 향기에도 은색이 있는가 하면 금색이 있고, 진한 보라색이 있는가 하면 밝은 보라색이 있다. 활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인쇄된 점은 활자가 검은색 아니 다른 색깔로 보인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색이 보인다는 말은 검은색 외에 다른 색이 이중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정한 글자가 연상시키는 특정한 색이 있다는 뜻이다. 공감각(syneschesia)이라 부르는 이중적, 또는 다중적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물지만 사람 중엔 여러 가지 감각을 겹쳐서 느끼는 이도 있다.
쇼팽도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쇼팽의 피아노곡을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에 빠진다. 쇼팽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개성 강한 그림을 전시하는 갤러리에 온 듯 유난히 색에 민감해지는 것은 그의 음악이 그만큼 색채감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캔버스에 칠하려고 짜둔 물감이 팔레트를 떠나 악보 위로 날아오르듯 쇼팽의 음악은 듣는 이의 마음 위로 색을 입힌다.
쇼팽 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쇼팽의 심장 이야기이다. 아마도 그의 심장을 색으로 표현하면 마젠타색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길게 덧칠한 마젠타가 온전히 마른 뒤 표현되는 색이 내 눈에 떠오르는 그의 심장 색깔이다. 붉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랏빛이라고 할 수도 없는 푸른빛 감도는 마젠타색은 진하거나 연한 보라와 함께 그의 음악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색이다. 그뿐 아니다. 쇼팽의 음악에서 내가 감지하는 색은 윤기 나는 경주마의 빛깔을 닮은 짙은 초콜릿색도 있다. 울트라 마린블루나 민트색 또한 그의 에튀드나 녹턴 같은 피아노곡에서 종종 발견되는 색이다.
“색은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라고 말한 이는 현대 추상미술의 문을 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아내 니나 칸딘스키이다. 작곡가 쇤베르크의 음악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의 아내답게 그녀는 “색은 피아노 건반이며, 눈을 피아노의 현을 때리는 망치이고,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라고 표현했다. 쇼팽의 심장 또한 나나 칸딘스키식으로 말하며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일 것이다. 영혼의 소리를 내는 그 피아노가 쇼팽의 고향인 바르샤바의 한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된 것이다.
그의 심장이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순간 나는 짜릿한 감동이 온몸을 훑고 가는 것을 느꼈다. 학창 시절 음악 교과서에서나 일던 신화 같은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확인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사실이 내 몸에 전기를 흐르게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톨릭의 성인 프란체스코가 생을 마감한 성당인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정원의 장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감동 비슷한 것이었다. 성 프란체스코가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 가시덤불 위로 몸을 던진 이후 지금까지 이 성당 정원의 장미엔 가시가 없다는 것이다.
고향인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쇼팽은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심장을 바르샤바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몸은 파리에 묻히고, 심장만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어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쇼팽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독립을 위해 일어나 폴란드의 혁명을 러시아가 진압했기 때문이다. 고향 소식을 듣고 쇼팽은 아마 절망과 함께 러시아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느꼈을 것이다.
폴란드에게 러시아는 코로나19보다 극악한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다.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큰지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하러 나설 당시 90만이라는 대군 중 7분의 1이 폴란드인이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폴란드 정부는 독일에서 철수하는 미군 병력의 일부를 자국에 주둔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폴란드의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는 러시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1975년부터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나라가 분할 통치된 쓰라린 역사가 있다. 한동안 세계지도에서 사라져야 했던 그 어두운 시기에 태어난 쇼팽은 20세가 되도록 바르샤바에서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나라를 되찾은 폴란드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다시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은 폴란드 문화를 말살하고 숱한 지식인을 살해했는데,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 지식인 2만여 명을 집단 살해한 ‘카틴 숲의 학살 사건’이 대표적 만행이다. 그 사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폴란드인의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은 아마 일본에 대한 우리의 증오심 못지않을 것이다. 나 또한 식민지 시절 고학을 하며 도쿄에서 공부한 선친이 입버릇처럼 되뇌던 "왜놈들은 나쁜 놈들이다"라는 말을 잊지 못한다. 귀국 후 무술 고단자이던 선친은 결국 주먹으로 일본인들을 때려눕힌 뒤 북간도로 피신해 해방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쇼팽의 심장이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폴란드인 친구한테서 처음 들었다. 이때 '처음'이라는 말은 어릴 적 피상적으로 알았던 쇼팽에 대한 상식적 앎이 강한 현실감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는 의미이다. 그건 아마 폴란드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한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한 그 친구는 지금 고향 폴란드가 아닌 런던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색채 전문가인 그는 한국에서 강의할 당시 학생들을 내가 있던 공간에 모아놓고 수업하기도 했는데, 인상적인 일은 강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까지 수업에 참여시켜 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할 만큼 수업 분위기가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시인도 예술가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악기를 이용해 연주하는 것도 아닌 시인을 과연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내 안에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다소 엉뚱하지만, "재진, 너는 예술가다"였다. 시인이 아니라 재진이라는 이름을 강조한 것은 아마 그와 나의 우정에 대한 신뢰나 친밀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곰이 출몰한다는 폴란드의 숲 이야기를 하던 그 또한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그가 얼마나 러시아를 싫어하는지를 나는 어느 날 베이징에 갔다 온다며 서울을 떠난 그가 예정보다 훨씬 일찍, 그러니까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돌아온 사건이 있고 나서 알게 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풍겨오는 공산주의 냄새가 싫어 일정을 취소하고 와버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듯 그는 코를 손으로 쥐며 고개를 내저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공산주의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의 아버지가 폴란드 독립 영웅이라는 사실과 그 아버지의 일대기를 영화감독인 사촌 형이 영화로 제작한다는 사연을 들은 뒤였다. 예민한 그의 오감이 공산독재 정권이 풍기는 냄새를 본능적으로 탐지하고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만나면 그와 나는 마구 떠들어댔다. 그는 영어나 폴란드어로, 나는 콩글리시와 한국어로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언어가 다르면서도 서로 통하는 걸 보면 그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동갑내기여서 통하는 게 있는 건지, 단어 하나만 듣고서도 우린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청국장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그를 내가 우리말을 잘 아는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듯 그 또한 내가 영어나 폴란드어를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면 다 통한다.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 이가 옥타비오 파스였던가, 누구였던가.
그의 고향인 폴란드로 날아가 2시간을 걸어도 끝이 안 보인다는 숲을 걷고, 숲속 동물들에 대한 동화를 쓰며 산다는 그의 누이를 만나보고 싶다. 그런데 성 십자가 성당 기둥 속에 안치된 쇼팽의 심장을 참배하기 위해 그와 함께 바르샤바로 갈 날이 내 인생에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세상은 바이러스에 의해 차단되고, 하루하루 그와 나는 노년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카톡으로 날아온 그의 사진을 보니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
옷깃의 주름은 다리미로 펼 수 있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펼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을 주름지게 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다. 나이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달력 속의 숫자일 뿐, 숫자는 노쇠를 겪는 인생이란 드라마의 소품으로 쓰다가 버릴 것이다. 나이보다 마음을 주름지게 하는 것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이다. 모르는 척하려 해도 이별은 언제 나 슬프다. 슬픈 이별을 기쁜 이별로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없다'이다. 기쁜 이별은 없으며, 기쁜 주름살도 없다.
소멸하는 것은 결코 기쁜 것이 아니다. 기쁘다고 우기지 말자. 소멸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슬픈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슬픈 것과 나쁜 것은 다르다. 러시아에 유린당한 약소국가 폴란드의 운명은 슬펐지만, 쇼팽의 인생이 슬펐던 것은 아니다. 그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갔는지 그가 남긴 마주르카나 녹턴, 프렐류드나 즉흥곡들을 들으며 우리는 예술이 슬픔보다 수명이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찾아온 슬픔을 문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슬픔은 힘이 세다. 우리는 슬픔을 망각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쇼팽의 피아노곡을 잘 치기 위해 건반을 연습하듯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연습할 수 있을 뿐이다.
글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