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 한창 관광철이라 산중에 있는 큰 절들은 조용할 날이 없다.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하던 산사(山寺)의 뜰은 흡사 장바닥이다. 항시 상중에 몸담아 살고 있는 처지에서 보면, 뭐 볼게 있다고 저리들 기를 쓰고 남의 집에 오는가 싶은데, 찾아 나선 쪽에서 보면 구경거리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예전부터 춘삼월 호시절(春三月 好時節)이란 말도 있듯이, 꽃이 피고 새잎이 피어나고 그 속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요즘의 숲은 하루가 다르게 수채화 같은 투명한 물감을 풀어내고 있다. 묵묵히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수런수런 새잎이 피어나는 것 같다. 새삼스레 사는 일이 즐거워지려고 한다.
며칠 동안 관광객들의 거둥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세상의 뒤뜰을 넘어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사진들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럿이서 왔을 경우에는 더욱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사진 찍기에 바빠 진짜 절구경은 저리 가라다. 저분들이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을까 싶을 정도로 깔깔거리며 ‘열심히 열심히’ 찍어대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하니까. 그러고는 후딱 떠나간다. 물론 몇 시 몇 분까지 대절해온 버스에 타야 다음 행선지로 떠날 수 잇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보고 있으면 도시의 지하도나 횡단보도 혹은 버스정류장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조급한 동작이다. 항상 바쁘게만 살아 왔던 일상의 그 동작이 그러지 않아도 될 장소에게까지 관성처럼 몸에 배어 ‘바쁘게 바쁘게’ 서두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이 수도원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담배를 피우다 말고 아무 데나 내버리는가 하면, 켁켁 사래를 돋우어가며 함부로 뱉는, 말하자면 ‘선진조국’의 깃발에 침을 뱉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제집에서 익힌 버릇이라 남의 집에 가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모양인가.
골이 빈 젊은이들 가운데는 아직도 라디오며 카세트테이프가 든 녹음기를 가지고 와서 고성으로 틀어대며 몸을 주체 못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일상의 소음에 잔뜩 중독이 되어 태고의 고요와 아늑함을 감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처럼 큰마음 먹고 먼 길을 떠나 왔으면서 한때라도 차분히 마음 턱 놓고 구경을 하든지 쉬어갈 것이지 왜들 저럴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우선 일상의 따분한 굴레에서 벗어나 낯선 풍경이나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그네길 위에서 시들어가는 일상적인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해 보려는 그런 소망에서 벼르던 끝에 길을 떠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뭣보다도 먼저 마음부터 느긋하게 먹어야 할 것이다.
바람소리와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보고, 이기 낀 기와 지붕위로 열린 푸른 하늘도 한번쯤 쳐다보고, 산마루에 걸린 구름이며 숲속에 서린 안개에 눈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돌담이며 굴뚝이며, 빛이 바랜 단청과 벽화 같은 것에도 눈길을 돌려볼 일이다. 시멘트로 뒤덮인 아파트단지 같은 데서는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살 같은 것도 한번쯤 유심히 눈여겨 볼만하고 기와집 추녀 끝의 영원으로 이어진 그 곡선에도 눈길을 보낼 만하지 않은가.
불고신자가 아닐지라도 불상의 온화한 그 미소를 대함으로써 날로 표정을 잃고 굳어져가는 우리들의 얼굴을 되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저 불상의 미소가 오늘의 얼굴과 어떤 연줄을 가지고 있는지 지나간 세월의 촌수를 한번 따져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시냇가에 가서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보라. 머리끝까지 전류처럼 흐르는 차고 부드러운 그 흐름을 통해 더덕더덕 끼여 있는 먼지와 번뇌와 망상도 함께 말끔히 씻겨질 것이다. 그리고 물소리에 귀를 모을 일이다.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로 깨우쳐 줄 것이다.
모처럼 노자를 써가면서 먼 길을 찾아 나섰으면, 그리고 그 곳이 시끄러운 저자가 아니고 고요와 평화가 깃든 山寺라면 그 고요와 평화를 마음껏 받아들여 어지러운 생각들을 씻어내야 한다. 조급하고 바쁘게 서둘던 그동안의 버릇은 잠시 떨쳐버리고, 한때나마 고요와 청정과 평온을 누림으로써 시들어가던 인간의 뜰을 소생시켜야 한다. 자연을 찾아왔으면 그 품에서 쉬면서 자연의 질서를 배우고 담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찰칵찰칵 사진이나 찍어대고 떠들다 돌아가면 벼르고 벼르던 끝에 찾아 나선 길이 아깝지 않겠는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종파에 구애받을 것 업이 법당에 들어가 향이라도 사르며 조용히 앉아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헤아려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토담 위에서나 길섶에서 다람쥐를 만나거든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아야 한다. 귀여운 재롱을 보고 있으면 문득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기도 할 것이다.
대개의 관광객들은 한꺼번에 많이만 보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본 것이 없게 된다. 그저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스쳐 지나갈 뿐이지 느끼고 생각하고 다질 겨를이 없다. 한 생애를 우리가 이렇게 살아버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우리가 증산이요 수출이요 소득증대요 능률의 극대화 등 ‘양(量)’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일단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왔으면 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나그네 길에서만이라도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삶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야 닳아진 인간의 영역을 회복시킬 수 있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여느 눈과 귀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정적의 뒤안길까지도 느끼고 받아들일 때 본래의 자기 모습에 눈뜨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고 많은 관광의 대상을 제쳐두고 굳이 불교의 수도원인 산사를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차분한 침묵의 관찰이 따라야 한다. 눈 속의 눈으로 보고 귓속의 귀로 들을 줄을 알아야 한다.
어젯밤부터 숲에서는 두견새가 운다. 멀지 않아 뻐꾸기와 꾀꼬리도 찾아올 것이다.
(83. 4. 23)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