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글 - 법정스님께서 남기신 글을 올립니다.
도서명 | 텅 빈 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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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해동할 무렵이면 봄앓이를 치르는 것이 유별난 내 체질이다. 겨울철에는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쌩쌩한데, 2월 말에서 3월 초가 되면 어김없이 그 증상이 찾아온다. 재채기와 콧물과 심할 때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코가 막히고 눈두덩이 가렵기도 하다. 그리고 사지가 나른해져 자꾸만 아랫목에 눕고 싶어진다.
이런 증산이 봄내 지속되기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주어야 한다. 이래서 나는 봄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얼어붙었던 겨울의 자리에 따뜻한 햇살과 촉촉한 흙과 새싹과 산들바람이 정답긴 하지만, 그런 증상을 감당해 내개가 힘겹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봄앓이’라고 하는데, 의사들 말로는 ‘알레지’라고 한다. 한번은 아는 수녀님이 내 봄앓이를 보고 자기도 나와 똑같은 증상이었는데 한약을 먹고 말끔히 나았다고 하면서, 부득부득 그 한약방에 데려가 진찰을 받고 약을 지어다 먹게 했다. 그렇지만 체질이 달라서 그랬는지 인연이 닿지 않아서였는지 내게는 아무 효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의사도 봄앓이를 하는지 코 먹은 소리에 목까지 잔뜩 쉬어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전문의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날 때는 그 지역을 한번 떠나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재작년 봄 로스앤젤레스에 가 있을 때는 전혀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마침 송광사 분원이 있어 그해 봄을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 고장에도 알레지 환자가 굉장히 많은 모양인데 그곳에서는 북쪽인 오리건 주로 가면 괜찮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말짱했는데 동부인 뉴욕과 보스턴 쪽에 가니 다시 재채기와 콧물이 났다. 돌아오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증상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증상이다. 작년 봄에 이 봄앓이로 시달리다가 볼일로 부산에 며칠 가 있는 동안에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산으로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다시 시작이었다.
지난 2월 말께부터 그 알레지군이 옛정을 잊지 않고 다시 나를 찾아주었다. 나는 속으로 ‘너 또 시작이구나! 알았다 알았어. 바쁜 일 대강 해치우고 3월 중에는 바닷가로 너를 데리고 가마’라고 달래었다. 병이란 살살 달래주어야지 모른 체하면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저께 나는 남쪽 바닷가 한 어촌으로 간단한 짐을 꾸려 가지고 봄앓이의 피접을 왔다. 말하자면, 그 지역을 떠나본 셈이다. 아는 신도가 방을 마련해 주어 옮겨 온 것이다. 청승맞게 자취도구를 챙겨 가지고 왔다.
산에서 살다가 바닷가로 오니 우선 공기의 질이 다른 것 같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 숲 향기 대신 염분이 밴 바닷내음이 묻어온다. 문을 열면 출렁거리는 바다가 있고 기슭을 핥는 물결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어선들이 들고 나는 통통거리는 소리와 갈매기와 물새들의 날갯짓과 우짖는 소리.
바다에 일몰이 오면 찬란한 빛의 조화를 지켜보는 침묵의 시간이 있다. 항포구 쪽에 불이 켜지고 그 불빛이 물결 위에서 일렁거린다. 산중의 밤은 이슥하고 적막한데 밤바다는 적막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조금은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바다는 늙을 줄을 모르는 것 같다.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일렁이고 출렁거리려고 한다.
산처럼 아늑하고 든든하고 차분한 맛은 없지만, 늘 무엇인가 떠나보내려 하고 떠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생동감이 있다. 산과 바다는 이와 같이 사뭇 대조적이면서도 그 뿌리는 인간의 대지에 함께 이어져 있다.
저 멀리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 위에도 줄줄이 불이 켜져 있다. 새벽녘에 보면 마치 진주로 된 목걸이로 육지와 섬을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 저 줄줄이 이어진 불빛들, 거기서 나는 인간의 체온 같은 것을 느낀다. 불빛이란 단순히 어둠만을 밝히는 것이 아닌 듯싶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고 뿔뿔이 흩어진 인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혈맥처럼 생각된다.
저 줄줄이 이어진 불빛들을 보고 있으니 몇 장면의 영상이 떠오른다.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는 동안 멀지 않은 그리피스 파크에 천문대가 있어 자주 올라갔었다. 거기 올라가 바라보면 1천만이 사는 광활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밤에 올라가면 야경이 장관이다. ‘보석의 바다’라고 할지 ‘불꽃의 바다’라고 할지···.
인간은 어째서 이런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사는지 새삼스런 물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조금 전에 지나온 할리우드의 휘황찬란한 밤의 활기도 여기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게 묻혀버리고 만다.
천문대 안에는 천장에 스크린이 장치되어 반쯤 누워서 천체의 신비를, 별들의 잔치를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한 시간짜리 이 필름을 보고 있으면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무변한 신비의 공간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우주에서 치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한줌의 흙덩이 같은 것. 사람은 거기에 매달려 있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먼지끼리 아옹다옹 다투고 싸운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여겨진다. 대로는 이런 우주적인 안목으로 인간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천문대 한쪽에는 우주적인 저울이 설치되어 있다. 1년 전 그 저울에 올라섰을 때 내 체중이 지구에서는 140파운드인데, 달에서는 겨우 25파운드밖에 안 되었다. 내 몸의 제곱쯤 되어 보이는 미국인 뚱보 아줌마는 자기 몸무게를 달의 것으로 친다고 하면서 깔깔댔다. 그런데 주피터별에서 내 체중은 무려 454파운드나 되었다. 그 주피터 별빛이 우리 육안에 들어오기까지는 4,600광년이나 된다니, 그리고 태양보다 4만 배나 더 밝다니 우주란 도대체 무엇인가?
110층에 높이가 435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이 바람의 도시 시카고에 있다. 시어스 타워. 전망대가 있는 103층까지 엘리베이터로 단 1분밖에 안 걸린다. 미국 제2의 거대한 도시를 시어스 타워에서 바라보는 야경 또한 장관이다. 바둑판처럼 네모진 거리로만 되어 있다면 야경은 너무 단조할 뻔했다. 그런데 사이사이 대각선이 걸려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낮 동안 세계적으로 이름난 거대한 건축물들을 구경하면서 인간의 능력이 새삼스레 대견하게 여겨졌으면서도, 한편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피땀 흘려 한층한층 쌓아 올린 바로 그 손으로 언젠가는 파괴하여 잿더미를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인류가 저지른 그 무수한 살육과 파괴의 전쟁이 바로 그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자행되지 않았던가.
거대한 건축물은 아무래도 비인간적이다. 부(富)에 따른 과시와 건물의 기능만을 문제 삼고 그 건축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 같다. 서양문화는 일찍부터 자연에 도전하고 그를 정복하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동양문화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것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려왔다. 인간적인 건축물은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주지만, 비인간적인 건축물은 인간을 압도하려고 든다.
밤의 불빛에 대한 또 하나이 영상은 야간비행에서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밤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오는 도중, 태평양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지상의 등불은 켈리포니아의 진주 목걸이처럼 느껴졌다. 영롱한 불빛의 가느다란 선이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연안으로 놓인 그 1번 도로를 따라 내려온 적이 있지만 밤의 불빛으로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육지와 섬을 이어주는 다리 위에 엷은 밤안개가 내리고 있다. 그 다리 아래로 몇 척의 어선들이 오고 간다. 산에서는 벌써 잘 시간인데 바닷게에 오니 잠이 안 온다. 밤바다의 영향인지 내 안에서는 자꾸만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그 지역을 떠나보라’는 효험이 난다면 나는 올 봄을 이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다.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