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글 - 법정스님께서 남기신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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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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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도 나는 책을 열두 상자나 치워버렸다. 책의 더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도서관으로 보냈다. 일상적인 내 삶이 성이 차지 않거나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소유물들을 미련 없이 정리 정돈한다. 소유물이래야 주로 책이므로, 그 책을 치워버리고 나면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내 삶에 새로운 탄력과 생기가 솟는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이런 짓을 나는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둘레는 온통 서책 더미로 울타리를 이루었을 것이고, 내 정신공간 또한 형편없이 옹색해졌을 것이다.
20대 중반 삶의 갈림길에서 훨훨 털어버리고 입산 출가할 때, 가장 끊기 어려웠던 별리의 아픔은 애지중지하던 책들이었다. 그때의 미련을 끊어버리기가 가장 괴로웠었다. 몇 날 밤을 두고 이책 저책을 들추다가 세 권을 골라 산으로 가져왔었는데, 그런 책도 얼마 안 되어 시들해지고 말았다.
괴테는 그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이 말이 문득문득 내 의식을 떠받쳐줄 때마다 관념적인 잿빛 지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청청한 나무로 대지에 뿌리내리고 싶어진다.
과다한 지식과 정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마음의 빛인 지혜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지식이 지혜로 심화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인간 형성의 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식이 낱말의 연결구조인 언어의 세계라면 지혜는 심연과 같은 침묵의 세계다. 침묵이 받쳐주지 않는 언어에는 영혼의 메아리가 없다.
이제는 어떤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가려볼 수 있는 눈이 조금 열린 것 같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고 책을 대할 때도 그렇다. 좋은 친구란 말이 없어도 함께 있는 시간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좋은 책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나에게는 좋은 책을 읽는 시간이 곧 휴식 시간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며 차를 마시는 그런 경우와 같다. 책은 탐구하는 일에는 부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탐구는 땀을 흘려 일하는 데서 비롯된다. 순수하게 몰입하고 집중하는 그 일과나 자신이 하나가 될 때 지혜의 문이 열린다.
3년 전 여름이던가, 한 친구가 보내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아주 기분 좋게 읽었다. 그 소설을 이틀에 걸쳐 읽는 동안 내 일과는 뒤죽박죽이었다. 예불 시간과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이 온전히 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였다.
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읽힌다. 그러나 재미만이 아니라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어야 한다. <소설 동의보감>은 이 재미와 메시지가 함께 조화를 갖춘 읽을거리다.
중국의 여류 작가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도 좋게 읽었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식인들이 검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와 사랑이 담긴 가슴 아픈 이야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0년의 시련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사랑을 지켜보면서 주인공들에게 애틋한 연민의 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노먼 베쑨>은 이른바 실명 소설인데, 한 의학도의 희생적인 인간애가 수행자인 나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하였다. 의학도라면 <소설 동의보감>과 함께 꼭 읽어둬야 할 책이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짐 속에 챙긴다. 몇 해 전 태평양 상공을 날면서 리처드 바크의 <소울 메이트(영혼의 동반자)>를 감명 깊게 읽었었다. 영혼의 동반자를 지니니 사람은 삶의 빛과 의미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생명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때는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듯하다가도 그것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이 동반자도 시절 인연에 따라 언젠가 서로 마주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지난해 늦가을 유럽을 여행할 때도 두어 권의 시집과 함께 쟝 그르니예의 <지중해의 영감>을 가지고 갔었다. 런던과 파리, 뮌헨, 쾰른, 베를린, 제네바 할 것 없이 가는 데마다 잔뜩 우거지상을 한 찌푸린 날씨라 짜증이 났었다. 푸른 하늘과 햇볕을 볼 수 없어 내 의식의 바닥에도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남불과 이태리 쪽으로 다니면서 지중해 연안의 푸른 바다와 밝은 햇살을 대하니 막혔던 숨이 활짝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들의 삶에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과 드넓은 바다가 얼마나 소중한 몫을 하는지 새삼스레 헤아리면서, 삼면이 바다에다 사철 밝은 햇볕이 철철 넘치는 우리 한반도의 지리적인 여건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지중해의 영감>을 읽으니 내 안에서도 무한한 창조력(영감)이 샘솟아 올랐다. 그 글이 쓰인 현지에 가서 읽으면 그 감흥이 훨씬 절절하게 다가선다는 사실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요즘은 소설보다 명상 계통의 서적을 접할 기회가 잦다. 몇 구절씩 펼쳐보다가 책을 덮어두고 나 자신을 읽고 싶다. 사실 좋은 책이란 책장이 솔솔 넘겨지는 책만이 아니라, 읽다가 덮으면서 나 자신의 속뜰을 들여다보는 그런 책일 것이다.
선가(禪家)에 이런 글이 전해진다.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
산에 들어와 살면서 이런 짓을 나는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둘레는 온통 서책 더미로 울타리를 이루었을 것이고, 내 정신공간 또한 형편없이 옹색해졌을 것이다.
20대 중반 삶의 갈림길에서 훨훨 털어버리고 입산 출가할 때, 가장 끊기 어려웠던 별리의 아픔은 애지중지하던 책들이었다. 그때의 미련을 끊어버리기가 가장 괴로웠었다. 몇 날 밤을 두고 이책 저책을 들추다가 세 권을 골라 산으로 가져왔었는데, 그런 책도 얼마 안 되어 시들해지고 말았다.
괴테는 그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이 말이 문득문득 내 의식을 떠받쳐줄 때마다 관념적인 잿빛 지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청청한 나무로 대지에 뿌리내리고 싶어진다.
과다한 지식과 정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마음의 빛인 지혜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지식이 지혜로 심화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인간 형성의 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식이 낱말의 연결구조인 언어의 세계라면 지혜는 심연과 같은 침묵의 세계다. 침묵이 받쳐주지 않는 언어에는 영혼의 메아리가 없다.
이제는 어떤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가려볼 수 있는 눈이 조금 열린 것 같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고 책을 대할 때도 그렇다. 좋은 친구란 말이 없어도 함께 있는 시간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좋은 책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나에게는 좋은 책을 읽는 시간이 곧 휴식 시간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며 차를 마시는 그런 경우와 같다. 책은 탐구하는 일에는 부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탐구는 땀을 흘려 일하는 데서 비롯된다. 순수하게 몰입하고 집중하는 그 일과나 자신이 하나가 될 때 지혜의 문이 열린다.
3년 전 여름이던가, 한 친구가 보내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아주 기분 좋게 읽었다. 그 소설을 이틀에 걸쳐 읽는 동안 내 일과는 뒤죽박죽이었다. 예불 시간과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이 온전히 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였다.
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읽힌다. 그러나 재미만이 아니라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어야 한다. <소설 동의보감>은 이 재미와 메시지가 함께 조화를 갖춘 읽을거리다.
중국의 여류 작가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도 좋게 읽었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식인들이 검은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와 사랑이 담긴 가슴 아픈 이야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0년의 시련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사랑을 지켜보면서 주인공들에게 애틋한 연민의 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노먼 베쑨>은 이른바 실명 소설인데, 한 의학도의 희생적인 인간애가 수행자인 나 자신을 몹시 부끄럽게 하였다. 의학도라면 <소설 동의보감>과 함께 꼭 읽어둬야 할 책이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짐 속에 챙긴다. 몇 해 전 태평양 상공을 날면서 리처드 바크의 <소울 메이트(영혼의 동반자)>를 감명 깊게 읽었었다. 영혼의 동반자를 지니니 사람은 삶의 빛과 의미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생명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때는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듯하다가도 그것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이 동반자도 시절 인연에 따라 언젠가 서로 마주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지난해 늦가을 유럽을 여행할 때도 두어 권의 시집과 함께 쟝 그르니예의 <지중해의 영감>을 가지고 갔었다. 런던과 파리, 뮌헨, 쾰른, 베를린, 제네바 할 것 없이 가는 데마다 잔뜩 우거지상을 한 찌푸린 날씨라 짜증이 났었다. 푸른 하늘과 햇볕을 볼 수 없어 내 의식의 바닥에도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남불과 이태리 쪽으로 다니면서 지중해 연안의 푸른 바다와 밝은 햇살을 대하니 막혔던 숨이 활짝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들의 삶에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과 드넓은 바다가 얼마나 소중한 몫을 하는지 새삼스레 헤아리면서, 삼면이 바다에다 사철 밝은 햇볕이 철철 넘치는 우리 한반도의 지리적인 여건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지중해의 영감>을 읽으니 내 안에서도 무한한 창조력(영감)이 샘솟아 올랐다. 그 글이 쓰인 현지에 가서 읽으면 그 감흥이 훨씬 절절하게 다가선다는 사실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요즘은 소설보다 명상 계통의 서적을 접할 기회가 잦다. 몇 구절씩 펼쳐보다가 책을 덮어두고 나 자신을 읽고 싶다. 사실 좋은 책이란 책장이 솔솔 넘겨지는 책만이 아니라, 읽다가 덮으면서 나 자신의 속뜰을 들여다보는 그런 책일 것이다.
선가(禪家)에 이런 글이 전해진다.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92. 8>
글출처 : 버리고 떠나기(法頂 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