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글 - 법정스님께서 남기신 글을 올립니다.
도서명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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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리산 일대를 다녀왔다. 지리산은 그 품이 넓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온갖 종류의 생물을 거느리고 있다. 그중에는 일부 종교의 기도원과 수도자가 그 품속을 의지해 살고 있었다.
먹물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띄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이 산중에서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중 한 젊은이는 초능력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신분이 승인지 속인지 알 수 없었다.
초능력이란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에 나도 근엄해져 초능력을 얻어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세상일을 환히 알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수행인지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 이런 일에 빠져드는 수가 있다. 남의 마음을 꿰뚫어본다는 것은 남의 사생활이 담긴 일기장이나 편지를 엿본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젊음을 불사를 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웃기는 짓이다.
남의 마음을 읽으려고 할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그 마음을 놓아둔 채 어떻게 남의 마음을 엿보겠다는 것인가.
재작년이던가, 휴거 소동으로 세상에 구경거리가 한판 벌어지는가 싶더니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종교계에서는 그 휴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예수 부활절에, 혹은 그 얼마 후에 진짜 휴거 가 있을 거라고 공공연히 ‘선교’를 하고 있단다. 타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부하기는 주저되지만, 무엇이 진정한 종교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인지 이 자리를 빌려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른 저의는 조금도 없다.
종말론은 일찍부터 심심치 않게 거론되어 온 주장이다. 거두절미하고 적어도 우리 시대에 지구의 종말은 없을 것이다. 지구가 종말을 향해 굴러가도록 방치할 만큼 오늘의 지구인들이 그렇게 우매하지는 않다.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의 후예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디이고 지옥은 어디인가.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만족할 줄 알고 오순도순 인간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일 것이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갈등과 고통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 아니겠는가.
휴거를 믿고 재산을 바쳐가면서 신을 찬양하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신의 존재가 너무 편벽되고 옹졸해진다. 그런 신이 어떻게 이 세상 만물을 주재할 수 있겠는가.
신은 하늘 높은 곳 어딘가에 앉아 있는 어떤 인격체가 아니다. 만약 어떤 종교가 그를 믿지 않는 계층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면 그것은 신의 종교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우주만물 속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신은 그 어떤 종교와도 독점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
이런 가르침이 있다. “‘나’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온갖 종교적인 태도는 마치 돌을 안고 물위에 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라고 하는 무거운 돌을 내던져라. 그러면 진리의 드넓은 바다에 떠올라 진실한 자기를 살리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은 어떤 이익이나 영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순수한 믿음 그 자체를 위해 닦는다. 종교는 하나의 교육과정이다. 이해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기교육이며, 이를 통해 우리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종교는 진실을 스스로 탐구하고 찾아내는 행위다.
세상에 많은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다. 그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으며, 한 사람의 개인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며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광신이나 열광으로 들뜨게 되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신이 어디 귀머거리인가. 신은 손뼉소리나 울부짖는 소리보다 침묵을 더 사랑하고 이해하신다. 한밤중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면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기도란 침묵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향기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침묵 속의 명상임을 알아야 한다.
정부의 한 부패관료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큰 스님도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까?”
선사는 태연히 대답한다.
“내가 먼저 들어갈거네.”
“덕이 높은 큰스님께서 지옥 같은 데를 들어가시다니요.”
“내가 만약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대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간절한 사랑이요 자비심이다. 한 이웃을 구제하기 위해 몸소 지옥에라도 기꺼이 들어가겠다는 비원이다. 사랑과 자비심이 우리를 들어 올리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오지도 않을 휴거를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라. 가기는 어딜 가는가. 지금 그 자리에서 사랑으로 천당을 이루라.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고.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