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인 <허당록(虛堂錄)>에 이런 표현이 있다.
시냇물 소리는 한밤중이요,
산 빛은 해질녘이라
泉聲中夜後 山色夕陽時
시냇물 소리는 한밤중의 것이 그윽해서 들을 만하고, 산 빛은 해질녘이 되어야 볼 만하다는 뜻이다.
낮 동안은 이일 저일에 파묻히느라고 건성으로 지내다가, 둘레가 고요한 한밤중이 되면 산중에서 들리는 거라고는 오로지 시냇물 소리뿐이다.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번뇌와 망상도 시냇물을 따라 어디론지 흘러가고, 지극히 편하고 그윽한 마음이 꽃향기처럼 배어 나온다.
해질녘 가라앉은 빛에 비낀 산색에는 생동감이 있다. 그 굴곡과 능선이며 겹겹이 싸인 산자락까지 낱낱이 그러나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산은 바라볼 만하다. 마음을 열고 무심히 석양의 산색에 눈길을 보내고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정신없이 바쁘게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 때로는 큰 마음먹고 여가를 내어 자연의 빛과 소리에 접할 수 있다면, 그 빛과 소리 안에서 많은 위로와 깨우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은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깃들게 된다. 제대로 명상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도 긴장감을 풀어야 한다. 전통적인 선원(禪院)에서는 흔히 그 긴장감 때문에 선정삼매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깨달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진다. 마치 물 속에 있으면서 목말라하는 격이다.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꽃 피어남이다. 지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적 탐구의 차원으로 심화됨이 없다면 깨달음은 결코 꽃 피어나지 않는다.
몸소 종교적인 삶을 살지는 않으면서 그것에 대해서 말로만 늘어놓으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말이란(글도 마찬가지) 시끄러운 것이고 공허한 것이다.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여기저기서 얻어듣거나 주워 모은 관념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은 말 이전의 침묵에서 그 움이 튼다.
종교적인 삶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절제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말이 많은 사람들은 안으로 생각하는 기능이 약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의 내면이 허술하기 때문이고 또한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주의 깊게 생각하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말하는 것보다는 귀 기울려 듣는 데 익숙해야 한다. 말의 충동에 놀아나지 않고 안으로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면, 그 안에 지혜와 평안이 있음을 그때마다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말을 아끼려면 될 수 있는 한 타인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을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제삼자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은 것은 나쁜 버릇이고 악덕이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당신과 나 인간 개개인이 변화하지 않고는 세상은 결코 변화될 수 없다. 현재의 이 사회와 세상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회가 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어떤 틀 속에 밀어 넣고, 또 그 틀은 사회라는 구조 속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말짱하던 우리 생활환경을 오늘처럼 허물고 더럽히고 어질러놓은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그래서 그 재앙을 오늘 우리가 받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져야 한다. 바로 그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변화를 일으킬 것을 지금 요구하고 있다.
사회가 변화되려면 말이나 이론으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인간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관이 고쳐져야 한다. 환경 문제도 그렇고 과소비 문제며 이른바 벼랑 끝에 선 경제적인 위기의 극복도 개개인의 의지와 생활습관에 달려 있다.
현재의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실한 과제다. 그리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해답은 바로 그 자기 성찰과 물음 속에 들어 있다.
이 ‘물음’이 각자 안으로 살피는 명상의 과제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혼돈의 수렁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내적인 힘에 의해서만 외적인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 내적인 힘은 외적인 것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2, 30년 전의 우리들 살림살이를 한번 되돌아보라. 그때는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그래도 인간다운 삶의 의지와 자세는 지니고 있었다. 연탄 몇 장을 가지고도 우리는 고마워하고 행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정다운 이웃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 그 시절에도 공직자의 비리와 부정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자질과 체면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거나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웃도 없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도 없다. 인간적인 자질과 체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래의 우리 얼굴인 자라나는 아이들까지도 인간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물로 빗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우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단순하게 살고 싶은데 인생 그 자체가 너무도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복잡하거나 모순되게 살지 말고 안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단순한 삶이 본질적인 삶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구제받을 수 있지, 밖에서 어떤 손길이 뻗쳐서 우리를 구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마른 가지에서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생명의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생명의 그 신비와 아름다움은 우리들 안에도 깃들여 있다.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만물이 살아서 움트는 이 봄철에 각자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으면 한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었으면 좋겠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