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을 고비로 장마가 개더니 밤으로는 달빛이 하도 좋아 쉬이 잠들 수가 없다. 앞산 마루 소나무 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달은 더 없이 정다운 얼굴이다.
잠옷 바람으로 뜰을 어정거리면서 달빛을 즐기다가 한기가 들면 방에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겉옷을 걸치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달은 어느새 중천에 떠 있다. 달밤에는 나무와 바위들도 달빛을 머금어 그 모습들이 한층 그윽해 보인다. ‘쏙독쏙독’ 쏙독새(일명 머슴새)가 내 머리 위로 몇 바퀴 맴돌다 날아가고, 저 건너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에 밤은 더욱 이슥하다.
밤이슬로 옷이 눅눅해져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방 안은 방 안대로 창호에 비친 달빛으로 넘치고 있다. 등잔불이 소용없다. 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창문을 연다. 잠자리에, 베개 위에 달님이 들어오신다. 달빛을 베고 누워 중천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본다. 달도 나를 내려다본다. 아. 달빛에서도 향기가 나네!
이것이 요 며칠 동안 되풀이해 온 내 밤의 놀이다. 요즘 같은 이런 달빛은 일년 열두 달을 두고도 쉽게 만나고비 어렵다. 밝기로 말한다면, 여름 달보다 가을달이 한층 더하지만 가을 달은 여름 달만큼 푸근하지 않다. 그리고 가을 달은 차고 쓸쓸하다.
강이나 산, 바람과 달은 정해진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 마음이 투명하고 한가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 정취를 누릴 수 있다. 이 같은 달밤이 없다면 산에 사는 재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이런 밤에 나는 따로 배우고 익히지 않는다. 달빛 아래서 어정거리기만 하여도 내 마음은 가득 넘치려고 한다. 이런 밤을 누구와 더불어 맞이할 것인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묘리를 터득하고 나면 홀로 있어도 그저 충만할 뿐이다.
모처럼 달님이 내 뜰에 오셨는데, 방 안에 꼿꼿이 앉아 좌선을 하고 경전을 펼쳐 든다면 그것은 달님에 대해 실례가 될 것이다. 일상에 구겨지고 얼룩진 우리들의 마음을 마치 달빛에 옷감을 바래듯이 맑혀야 한다. 달은, 좋은 달빛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 어떤 선비는 밤에 잠자리에 들려고 하다가 밝은 달빛이 방 안에 비쳐드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났으나, 생각해 보니 가까운 이웃에는 함께 달빛을 즐길 만한 벗이 없었다. 달밤의 정취는 아무하고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리 밖 절에 가 있는 한 지기를 생각하고 그를 찾아 갔더니, 그도 또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뜰을 거니는데, 뜰은 마치 호수와 같아서 물 속에 수초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가 달빛에 서로 엉켜 있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달을 좋아하여 노래하고 읊은 시인 묵객들이 많지만, 그 중에도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하는, 뜻도 잘 모르던 가락이 어린 시절 우리들 입에 곧잘 오르내렸었다.
‘달 아래서 홀로 마시며 (월하독작-月下獨酌)’라는 연작시가 있는 걸 보아도 그가 얼마나 달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 비친 달이 너무 아름다워 그걸 건지려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그 길로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연은 실로 풍류시인의 죽음답다.
서산에 해 기울어 산그늘이 내릴 무렵, 훨훨 벗어 붙이고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매는 일이 요즘 오두막의 해질녘 일과다. 맨발로 밭흙을 밟는 그 감촉을 무엇에 비기리. 흙을 가까이하는 것은 살아 잇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흙을 가까이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물을 데워 끼얹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날개라도 돋아날 듯 상쾌한 기분이다.
동산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맞이하는 날, 나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것은 요 근래에 생긴 새로운 버릇인데, 둥근달을 맑은 마음으로 마중하기 위해서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