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자락에는 산국이 한창이다. 꽃의 모습도 야생화답지만 그 향기가 가을꽃 중에서는 일품이다. 두어 가지 꺾어다가 햇살이 비껴드는 오후의 창가에 놓아두니 은은한 산국의 향기로 방 안이 한층 그윽하고 고풍스럽다.
철 따라 그 철에 어울리는 꽃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신비다. 이 자연의 오묘한 신비 앞에서 아름다움의 뒤뜰을 넘어다본다. 요즘 세상에서는 다들 돈타령, 경제타령만 하느라고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나 관심 갖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질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과 행복이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만 있고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너무 삭막하고 건조하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모른다면 결코 행복에 이룰 수 없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살아 있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남쪽에 내려가 쉬면서 한 암자의 뜰에 있는 연못에서 나는 아름다움이 뭐라는 걸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 연못이래야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 세로 두어 자, 가로 너댓 자 될까 말까 한 작은 규모이다. 넘치는 샘물에 청죽(靑竹)으로 홈대를 만들어 연못으로 끌어들인 구조인데 거기 수련과 창포와 바위와 이끼와 올챙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연못에 가득 차지 않고 3분의 1쯤 남은 빈자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작은 연못은 아름다움의 한 요소인 ‘여백의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덜 채워져 좀 모자란 듯한 구석, 그립고 아쉬움이 따르는 그런 운치를 지닌 사랑스런 연못이었다. 홈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적막한 산중의 분위기를 한층 적막하게 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연못가에 앉아 저 미륵반가사유상이 지닌 고요와 평안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곤 했었다. 연못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정한 노송이 서너 그루 있는데 앞산에 달이 떠 가지에 걸릴 때 연못에 비출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상상만으로도 족했다.
또 아름다움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시(詩)가 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 없네
바람에 일렁이는 대와 뜰과 달과 연못이 한데 어울리면서도 서로 거리낌이 없는 이런 경지가 아름다움이 지닌 오모한 조화이다. 뛰어난 장인(匠人)은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안에서 솟아난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은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이웃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즉 이웃과 나누는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시시로 가꾸어야 한다. 인정의 샘이 넘쳐야 나 자신의 삶이 그만큼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가리켜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가을에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다들 행복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