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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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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의 한국순교복자수도원
/ 성찬경
때묻은 마음과 몸을 끌고
또 갈까나, 성북동 깊숙한 곳.
은총이 쪼이는 곳.
이승의 양지.
초롱불처럼 열린 감나무 둘러보며
굽은 길 잠깐 돌아 복자교(福者橋) 건너는 날,
맑고 시원한 한국의 가을이다.
이곳에 오면 눈의 안개가 좀 걷히고
사물(事物)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같다.
방(方) 원장(院長) 신부(神父)님 계시는 방, 암자라기엔 차라리
그냥 아담한 방이지만,
성녀상(聖女像), 해묵은 책,
새집, 담배도구,
모두가 행복하게 재미있구나.
백발의 큰 두골(頭骨), 둥근 얼굴, 둥근 몸매.
무한량 둥근 그분의 마음이
`만나'처럼 스며 시원하고 훈훈하다.
넓은 창에 햇살도 바람도 잘 들지만
아무래도 그뿐이랴.
그분의 훈훈함이
소리없이 퍼짐이리.
평생 두고 오르고 또 오른
그분의 덕(德)의 봉우리를
헤아릴 수는 없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음성에 귀 기울인다.
대여섯쯤 모인 둘레의 사람 중엔
벌써 단잠에 빠진 이도 있다.
절로 그렇게 잠이 온다는 듯이.
무거운 말씀도 가볍게 날아오고
가벼운 웃음에도 땅덩이 같은 무게.
드시는 논리(論理)와 비유(比喩)도 가지가지.
이를테면 무(無)의 한 점(點)에서 비롯되어
선(線)으로 뻗고, 면(面)으로 퍼지고,
삼차원(三次元)의 집이 서고, 시간이 흘러
초차원(超次元)으로 넘어가는 행복의 구조.
그 속에 숨이 통하고 피가 흐른다.
인류의 숙명에서 제일 좋은 말,
`자유'란 말의 뜻이 날개를 펴고,
또 귀한 `양심(良心)'이란 말에 불이 켜지고,
금강석처럼 결정(結晶)되는 또 좋은 말 `의지(意志)'.
그분의 입술에선 아득한 이 말들이
참으로 알차게 보람있구나.
`불은 바로 사랑의 표상(表象)이 아니더냐.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은
바로 겸양의 표상이 아니더냐.'
그리곤 마침내 지극히 경건하게
신비의 심장을 열으시었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피와 살로 합치는
극치가 바로 면형(麵形)이 아니더냐.'
덕(德)을 쪼이는
시간은 빨리 간다.
이미 어둑어둑한 방에
만종이 은은히 울려온다.
그 여운 속에 나직이 나직이
`참으로 복되도다, 성인(聖人)의 죽음이여.'
하시는 말씀이 흐르고 있었다.
* 방원장신부(方院長神父)님은 이 수도원의 창설자이신 방(方) 안드레아 신부님. 신부님은 1986년 1월 24일에 별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