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옛 추억의 사진을 올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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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 황량한 도시의 '오아시스' 커피와 다방은 미군정 시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대중화된다. 미군부대에서 인스턴트 커피가 흘러나왔는데, 특히 C레이션에 들어 있던 '시커멓고 쓰디쓴 가루'는 한국인들에게 커피의 맛과 향을 각인시키는 계기였다. 그 시절 커피는 회충약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연신 설사를 하자, 그것을 회충이 죽어서 생기는 현상으로 여겼던 것. 이후 커피는 소화제, 각성제, 숙취해소를 위한 해장음료 등으로 여겨지면서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국내 최초의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개장한 '카카듀'였다. 1930년대에 작가 이상(李箱)도 다방 '제비'를 운영한 적이 있다. 신문물의 일종인 다방은 만인의 휴식처였다. 1950년대 이후 전성시대를 맞은 다방은 대학생들의 단골 미팅장소였으며, 직장인들끼리 "차나 한 잔 하자"는 인사말을 건네게 된 계기가 됐다. 달달한 커피에 날달걀 노른자를 띄운 '모닝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2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방이 안식처이자 연락처이자 사무실이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설탕 여섯 스푼을 곁들여 마시는 커피, 하루종일 눌러 앉을 수 있는 의자, 나름의 관능미를 발산하는 마담과 레지(여종업원),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전화 등 다방의 4대 요소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뭔가 한 건을 꾸미는 사람들, 갈 곳 없는 실업자들, 취직을 청탁하는 사람들 등등.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다방에서만은 사장님이 될 수 있었다. 마담의 붉은 입술에서 퍼져 나오는 호칭 "사장니~임!" '사장님'이 답한다. "이봐 김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이번에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내가 다이아 반지 하나 해 줄게." 이 헛소리급 호언장담은 왕년 명배우 허장강을 흉내낼 때 빠지지 않는 대사다. 전후의 황폐한 도시에서 암울해 보이기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무슨 일이라도 해보고자 몸부림쳤던 열망들은 모두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방은 황량한 도시의 오아시스였는지도 모른다. 1959년 서울에는 822개의 다방이 있었다. ('조선일보' 1959.11.1) 글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출처 : 조선일보 2008.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