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고고클럽이었던 ‘닐바나’ 의 광고전단

고고클럽, 미드나이트 레볼루션 혹인 열반의 추억

모든 것은 닐바나(Nirvana)에서 시작되었다. 집단적인 음악적 경험과 관련해 닐바나라는 이름은 청장년층이나 초로기의 ‘마음은 청춘’들 모두에게 열반의 추억을 낳은 존재로 남아 있다. ‘1990년대의 아이들’에게 닐바나는 앨범 <네버마인드>(1991년)로 얼터너티브 붐의 도화선을 지펴 팝 음악계의 지형을 바꾼 미국 밴드일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의 청년들’에게 닐바나는 최초의 고고클럽으로 개장(1971년)하며 한국 팝의 1970년대를 고고클럽의 시대로 채색하기 시작한 곳일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물리적 거리와 20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아련하면서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는 ‘좋던 시절’의 상징이란 점에서 두 닐바나는 공통적이다.

1971년 서울 회현동 오리엔탈호텔에 둥지를 튼 닐바나는 최초의 고고클럽답게 ‘온갖 조류와 맹수의 표본, 환각조명, 원색 슬라이드 및 블랙 라이트로 장식된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했다(<주간경향>, 1971년 4월 28일치). 닐바나란 이름을 작명하고 기획과 출연진 섭외를 맡은 인물은 전에 언급한 바 있는 ‘그룹 사운드의 막후지원자’ 서병후였다. 닐바나는 일급 그룹 사운드들이 무대에 올라 연주한 라이브 공간이자, 주류가 유통되는 술집이자, 장안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선남선녀들이 춤을 추던 댄스 공간이었다.

닐바나, 나아가 고고클럽이 새로웠던 것은 술과 라이브 연주가 어우러진 생음악 살롱의 특징에 더해 플로어에서 자유로운 춤의 향연이 벌어진다는 점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이 합쳐진 것과 비슷했다. 알코올을 곁들이면서 음악을 온몸으로 즐기는 공간이란 점에서 고고클럽의 등장과 유행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닐바나 이후, 풍전호텔, 로열호텔, 타워호텔, 센트럴호텔, 라이온스호텔, 천지호텔 등 장안 곳곳에 고고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고고클럽은 기본적으로 ‘호텔 나이트클럽’이었지만, 그룹 사운드의 록 음악과 청년 중심의 공간이란 점에서 기존의 업소들과 달랐다. 물론 호텔을 끼지 않은 독자적인 고고클럽도 뒤따랐고, 서둘러 고고클럽으로 개조하거나 고고타임을 운영하는 나이트클럽들도 늘어가는 등 고고클럽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나중에는 이른바 ‘막걸리 고고장’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고고클럽이 청년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으면서 그룹 사운드에 대한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키 브라더스’, ‘피닉스’, ‘더 멘’, ‘데블스’, ‘파이오니아’, ‘드래곤스’, ‘템페스트’, ‘검은 나비’ 등 당시 고고클럽을 뜨겁게 달군 그룹 사운드의 명단을 일별하는 일은 1990년대 인디 음악을 거론하면서 ‘크라잉 넛’, ‘노 브레인’, ‘코코어’, ‘삼청교육대’, ‘허클베리 핀’ 등을 열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일일이 말할 수 없지만 그건 너무 많아서이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울러 미8군 쇼 무대와 생음악 살롱, 시민회관을 거점으로 등장한 그룹 사운드 1세대에 이어 고고클럽을 둥지로 한 그룹 사운드 2세대도 속속 등장했다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다.

  고고클럽은 그룹 사운드의 연주, 젊은이들의 춤, 그리고 맥주가 중심이 된 새로운 형태의 공연장이자 유흥 공간이었다. 하지만 중심축은 뒤로 갈수록 후자에 기울었다. 플로어의 청년들이 흥겹게 춤추며 즐길 수 있는 최대공약수에 해당하는 음악들이 중심이 되어간 것이다. 그래서 고고클럽은 그룹 사운드의 요람이었지만, 창의적인 음악을 분만하는 데는 한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미권처럼 공연과 투어가 자리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이곳’의 사정을 고려하면 사치스런 가정이다. 엄혹한 유신시대, 야간 통행금지가 엄존하던 시절, ‘밤드리 노닐던’ 청춘들이 자정부터 새벽까지 문 걸어 잠근 고고클럽 안에서 억눌린 자유를 제한적으로 풀어헤치던 공간으로서 고고클럽은 족했다. 불법이었지만, 법과 권력이 정의와 거리가 멀던 시절인 바에야.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