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옛 추억의 사진을 올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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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중삐리' '고삐리'의 로망 이소룡 영화는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는 그가 생전에 완성한 영화이다. 아쉽게도 다섯 번째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는 도중 33세 나이로 돌연 사망했다. 몇 편 안 되는 영화를 통해 그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수필집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를 펴낸 시인이자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존경) 가득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감독한 유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용쟁호투'를 보기 위해 아버지의 '바바리'로 변장을 했다. 수업 빼먹고 극장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이소룡 영화를 보았으며, 버스비를 아껴 '맹룡과강' 입장료 600원을 마련했다. "중삐리, 고삐리 시절 이소룡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영화관람이 아니라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일종의 축제였다."('사망 30주년, 이소룡 다시 보기') 이소룡 영화를 보는 경험 그 자체가 또 다른 한편의 영화였던 셈. 이소룡 영화를 무엇에라도 홀린 듯 반복해 보았던 사람이 한 둘일까. 소설가 고종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정무문'을 세 번 보았다. 그리고 그 뒤 국내에서 잇달아 개봉한 '당산대형' '맹룡과강'(1972), '용쟁호투'(1973)도 모두 두 번씩 보았다. 그래서 브루스 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스산했다."('오늘 속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우리를 힘겹게 했고,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가슴이 답답하던 시절이었다. 입시의 중압감 속에 장래에 대한 불안과 실존적 위기를 겪어야 했던 1970년대 청소년들에게, 이소룡은 지금―여기가 아닌 장소를 꿈꿀 수 있게 했고, 정의를 위한 모험을 견뎌낼 수 있는 강하고 올바른 몸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리라. 글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출처 : 조선일보 2008.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