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이소룡


수많은 '중삐리' '고삐리'의 로망

이 땅에 이소룡 열풍이 몰아친 것은 영화 '정무문'이 국내 개봉된 1972년부터다. 쉬는 시간에 한 명이 "아비요오~~" 소리 지르며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튕겨주면, 재빨리 다른 아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악역의 무리가 된다. 가방에 쌍절곤 넣고 다니는 친구가 한 반에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시절, 마당이나 옥상 한 쪽에 샌드백이 걸려있고 붕대를 감은 아령이 놓여 있었던 그 시절 이소룡은 대한민국 사내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이소룡 영화는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는 그가 생전에 완성한 영화이다. 아쉽게도 다섯 번째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는 도중 33세 나이로 돌연 사망했다. 몇 편 안 되는 영화를 통해 그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약자를 보호하는 쿵푸의 윤리, 강력하면서 엄격하게 절제된 무술 동작, 전광석화와도 같은 쌍절곤의 움직임, 괴조음에서 전달되는 강렬한 카리스마, 검정색 줄이 들어간 노란 트레이닝복, 가슴 깊은 분노를 드러내는 냉소적인 표정,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살짝 맛보는 모습, 상대편을 공격하기 전에 왠지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 그리고 악당을 쓰러뜨린 후에 그의 얼굴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미안함의 그림자, 아름다운 아가씨의 유혹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쿨한' 모습.

수필집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를 펴낸 시인이자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존경) 가득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감독한 유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용쟁호투'를 보기 위해 아버지의 '바바리'로 변장을 했다. 수업 빼먹고 극장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이소룡 영화를 보았으며, 버스비를 아껴 '맹룡과강' 입장료 600원을 마련했다. "중삐리, 고삐리 시절 이소룡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영화관람이 아니라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일종의 축제였다."('사망 30주년, 이소룡 다시 보기') 이소룡 영화를 보는 경험 그 자체가 또 다른 한편의 영화였던 셈.

이소룡 영화를 무엇에라도 홀린 듯 반복해 보았던 사람이 한 둘일까. 소설가 고종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정무문'을 세 번 보았다. 그리고 그 뒤 국내에서 잇달아 개봉한 '당산대형' '맹룡과강'(1972), '용쟁호투'(1973)도 모두 두 번씩 보았다. 그래서 브루스 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스산했다."('오늘 속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우리를 힘겹게 했고,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가슴이 답답하던 시절이었다. 입시의 중압감 속에 장래에 대한 불안과 실존적 위기를 겪어야 했던 1970년대 청소년들에게, 이소룡은 지금―여기가 아닌 장소를 꿈꿀 수 있게 했고, 정의를 위한 모험을 견뎌낼 수 있는 강하고 올바른 몸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리라.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김진복-멋진 남자야

출처 : 조선일보 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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