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백색전화


전화 회선 부족하던 시절… '끗발'의 상징

"그 집에는 주인집 장 씨네에도 없는 백색전화라는 게 있을 정도로 끗발이 세었다.…백색전화가 어떻게 생겨부렸던가? 웬걸 깜장인 게로 흑색전화인가부던데? 분명히 백색전화라고 혀서 전화 중에서 젤로 비싸다 혔는디, 사람들이 잘못 알아부렀나? 그때까지만 해도 백색전화니 청색전화니 하는 말들이 색깔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남에게 어느 만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가 하는 조건을 뜻하는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김소진 '장석조네 사람들')

1960년대 우리나라 전화 사정은 극도로 열악했다. 회선 공급과 교환시설 부족으로 수요에 공급이 미치지 못하니 권리금 붙은 전화 매매와 매점매석, 전화가입권 담보 사채업, 무단 임대까지 성행하여 사회문제가 됐다. 가입신청 뒤 전화가 놓일 때까지 1년 이상까지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전화 배정을 둘러싼 비리가 만연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위를 이용해 압력성 청탁을 하거나 관계자에게 뇌물을 건넸다가 적발되는 일도 잦았다. 전화가입 업무 담당자의 '끗발'도 대단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고 정부는 1970년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전화가입권을 양도할 수 있는 전화를 '백색전화', 전화사용권만 인정되는 전화를 '청색전화'로 구분했다. 이미 가입한 전화는 백색전화라고 해서 종전대로 가입대장 색깔을 백색으로 했고, 법 개정에 따라 새로 승인한 전화의 가입대장 색깔은 청색으로 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재산권의 일종이던 전화가입권을 사용권으로 제한하고 가입권의 양도와 증여를 금지하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백색전화의 프리미엄이 치솟기 시작했다. 백색전화의 끗발은 대단해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의 상징으로 통했고 70년대 백색전화 가격이 200만 원을 넘기까지 했으니, 백색전화 회선을 일종의 투기목적으로 사는 부유층마저 있었다. 회선 공급 확대와 교환기 증설이 근본대책이라면, 백색전화 청색전화 제도는 미봉책이었던 셈.

그러나 정부의 대책은 필사적이었다. 같은 장소에 두 대 이상의 가입전화가 설치된 다양한 경우를 복수가입전화로 분류하여 가입 취소 같은 제재를 가했다. 통화량이 적은 주택용 전화, 특히 농어촌 지역 전화에 대해 가입회선 하나를 여러 가입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전화, 아파트단지나 대형건물에 소형 교환시설을 설치 운용하는 집단전화도 대안으로 시행됐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낳은 문제는 결국 균형을 통해 풀렸다. 1980년대 이후 전화회선 공급이 늘어나면서 전화가 투기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 1970년 당시 전화가입자 수가 전국적으로 45만7280명. 2006년에는 휴대전화 가입자가 4천만 명을 돌파했으니, 우리 통신 역사도 지난 30여 년간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왔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전화통신 - 남백송/복수미

출처 : 조선일보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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