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채변봉투


봄·가을 연례행사… 기생충 퇴치 '일등공신'



(비위가 약하거나 음식을 먹고 있거나 식사 직전인 분들은 가급적 이 글을 읽지 마시기를.) 채변(採便)은 과거 봄·가을 두 차례 학생들이 치러야 했던 연례행사였다. 선생님이 나누어준 채변봉투 겉에는 주의사항이 쓰여 있다. 반드시 본인의 변을 받아라, 비닐봉투에 넣을 때 봉투 입구에 변이 묻지 않게 해라, 소독저로 세 군데 이상 밤알 크기로 떠내라. 넣은 변이 새어 나오지 않게 비닐봉투를 실 같은 것으로 봉하라 등등.

이 가운데 밤알 크기라는 게 난감하다. 실한 밤알 크기라면 비닐봉투가 받는 압박이 크기 때문이다. 시인
안도현의 '밤알 크기에 대한 성찰'(산문집 〈사람〉)이 사뭇 날카롭다. "첫째, 70년대 이후 나라에서 개량종 유실수 심기를 권장한 덕분에 밤알이 굵어졌을 뿐이지, 원래 우리의 토종 밤알은 아주 자잘하다는 것. 둘째, 그 문안 작성자가 도토리를 밤알로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셋째, 그 문안 작성자의 한글 표현 능력이 심히 의심된다는 것."

반드시 본인의 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어기는 유형도 가지가지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불특정 다수의 변을 혼합 채취하거나 친구 또는 가족의 변을 빌려 넣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집에서 키우는 개의 변을 넣거나 색깔과 모양에서 유사품(?)이라 할 된장이나 심지어 중국집 춘장을 넣은 경우마저 있었다 한다. 선생님에게 들킨 어린이의 변명 아닌 변명. "저 설사 나서 채변 못해요." 검사 결과에 따라 선생님에게서 구충제인 산토닌을 받아 빈속에 먹고 메스꺼워지거나 어지럼증을 느껴야 했던 학생들의 머쓱함이란.

채변이 전국적 연례행사가 된 것은 물론 우리나라의 심각한 기생충 감염 문제 때문이었다. 1960년 우리나라 국민의 95% 이상이 기생충 감염 상태였다. 결국 1964년 사단법인 한국기생충박멸협회(나중의 한국건강관리협회)가 창립되고 1966년 기생충예방법이 공포됐다. 그리고 1968년 학생과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기생충 검사와 집단투약사업이 시작됐다.

채변검사에 관해 지금도 궁금한 것. 그 수많은 학생들의 변을 어떻게 일일이 다 검사할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 소문도 나돌았다. "다 검사하는 게 아니라 한 반에서 몇 명만 검사한다더라." 이런 소문은 다소 인도주의적(?) 염려에서 비롯됐다.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누군가는 몇 날 며칠 남의 변만 들여다보고 있겠구나."

채변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을까? 1997년 우리나라는 세계보건기구로부터 기생충 퇴치 성공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시야를 세계로 넓히면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기생충학 분야 1세대 학자 임종한 박사는 중국, 라오스, 탄자니아, 북한 등의 기생충 박멸 사업에서 큰 구실을 하고 있으니, 채변의 시대는 장소를 바꾸어 계속되고 있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고향의 봄 (하모니카 연주)

출처 : 조선일보 200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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