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혼·분식 장려


'꽁보리밥 도시락'이 칭찬받던 점심시간

도시락을 여는 순간 아뿔싸! 눈앞이 캄캄.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손바닥 이리 내! 화장실 청소하고 반성문 써."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 사이에 학교를 다닌 이들은 이 흔했던 교실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도시락에 싸오는 밥의 30% 이상이 잡곡이어야 한다는 철칙. 철칙에 대응하는 자세는 다양했다. 밑에는 쌀밥을 담고 맨 위에만 보리밥을 살짝 깔거나 친구에게 보리밥을 빌리기도 했지만, 숟가락으로 뒤집어 보기까지 하는 선생님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등교 직후 검사와 수시 검사마저 이루어졌다. 더구나 밥알이 서로 적당히 붙어야 제대로 말 수 있는 소풍 김밥에 어떻게 보리밥 30%를?

그러나 당시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J씨(41·가정주부)는 혼·분식 장려를 좀 다르게 추억한다. "도시락 싸 간다는 것 자체가 힘겨웠던 형편이었으니, 그나마 꽁보리밥 도시락이라도 창피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도시락 검사를 할 땐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지요. 제 집안 형편을 아는 담임선생님은 그런 저를 모르는 척 칭찬해 주시기도 했어요. 저에게 보리밥을 빌려가는 친구들도 많았지요. 아마 저 같은 처지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1976년 대도레코드사에서 나온 '국민학교 새 교과서에 따른 한국동요전집6'에도 실렸던 노래 '즐거운 혼분식'이 귓가에 선하다. '모자라는 흰쌀에만 마음 쏠리던/ 연약한 지난날 이제는 안녕/ 잡곡이 밀어주는 알찬 살림에/ 우리도 즐겁게 살아가겠네/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어려운 식량 사정에서 비롯된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은 비단 학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1969년부터 정부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일명 무미일(無米日)로 정하여 그날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 1975년 서울시의 혼·분식 위반업소 단속결과 허가취소 8건, 1개월 영업정지 691건, 고발 조치 637건일 정도였다. 경기도의 한 군청 식당에서 흰 쌀밥만 사용한다는 첩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필로 보고서에 이렇게 메모했던 시절이다. '혼분식을 단속하고 ○○군수는 문책할 것.' (75년 6월 20일)

토요일 외식 메뉴로 자장면이 각광받게 된 것도 이 덕분이었을까?

그러나 1971년 다수확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영농기술이 향상되면서 1977년 쌀 자급 시대가 열렸다. 정부는 분식의 날도 없애고 쌀 막걸리 제조도 14년 만에 허용했다. 혼·분식 장려 정책 최대의 수혜자는 라면 생산업체일 것이다. 1963년부터 출시된 인스턴트 라면은 혼·분식 장려에 힘입어 일약 제2의 주식 위치로 도약하면서 '밥심으로 산다'는
한국인의 입맛을 어느 정도 바꿔 놓았다.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박인희-접동새

출처 : 조선일보 200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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