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옛 추억의 사진을 올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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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구경 했겠지만 역사 설명과 함께 음미해 봅시다. 昌德宮은 1405년(太宗 5년) 正宮인 景福宮의 離宮으로 지은 宮闕이다. 景福宮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昌慶宮과 더불어 東闕이라 불렀다. 壬辰倭亂으로 모든 宮闕이 불에 타자 光海君 때에 다시 짓고 高宗이 景福宮을 重建하기까지 正宮 역할을 하였다. 1910년 소위 韓日合邦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26년 純宗이 大朝殿에서 승하하자 日帝는 殿閣을 헐어 展示場과 각종便誼施設을 마련하여 일반인에 공개함으로 왕조의 권위를 격하시켰다. 한때 秘苑으로 縮小·歪曲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대대적인 復元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朝鮮王朝의 宮闕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歷代帝王이 거처했던 宮闕이며 현재는 朝鮮時代 宮闕의 後苑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宮闕로 남아있다. 敦化門 (寶物 383호) 昌德宮의 正門으로 1412(太宗 12년)에<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敦化門은 1609년(光海君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宮闕 正門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른 宮과 다른 점은 正殿과 軸이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門앞으로는 鐘路로 향하는 大路가 정면에 배치되고 錦川橋를 지나 1997년에 復舊한 進善門에 이르면 왼쪽에 仁政門과 맞은편 동쪽에 위치한 肅章門이 사다리꼴의 부정형으로 仁政殿앞뜰을 이루고 있다. 기존 宮闕의 형식과는 달리 자연스런 배치를 채댁한 것이다. 敦化는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朝鮮 時代에는 이층 門樓에 종과 북이 있어 時刻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않다. 錦川橋 - 太宗 11년(1411) 3월에 진선문 밖에 처음 석교가 세워지니 이것이 곧 현재 錦川橋의 건립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宮闕의 錦川橋 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昌德宮錦川橋다. 進善門 - 昌德宮이 創建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進善門에는 太宗代와 英祖代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王이 직접 해결해 준다는 申聞鼓 혹은 登聞鼓가 있었다고 전한다. 肅章門 - 進善門을 지나면 長方形의 마당을 따라 마주보이는 것이 肅章門이다. 이 肅章門 역시 成宗 6년(1475) 左贊成 徐居正이 문 이름을지어올린 것을, 成宗이 落點하여 지었다고 한다. 肅章門과 進善門 사이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 호위청, 상서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仁政門 뜰과 朝廷 마당에서 공식적인 宮中儀式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肅章門과 進善門을 포함한 일대의 행각은 日帝때헐리어 화단으로 꾸며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인정문(仁政門 - 寶物 813호) - 太宗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오늘날 볼 수 있는 인정문은 영조21년 (1745년) 3월에 중건한 것이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에 필적하는 조선 중기의 명필 북악이해룡의 글씨라고 전한다. 인정전(仁政殿,국보 225호)-태종 5년(1405) 昌德宮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太宗18년(14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世宗 즉위년(1418년) 9월에 준공되었다. 팔작지붕의 重層建物로 몇 차례의 燒失과 重建이 반복되다가 1908년 순종이 日帝에 의해 강제로 慶雲宮에서 옮겨 거주하면서 度支部 建築所에 의해 仁政殿 내부를 서양식 실내장식 위주로 개조되었다. 지붕의 용마루 양성에는 당시 國章이던 李花문장 다섯개를새겨 넣었으며 1908년 무렵에는 내부에 서양식 家具와 실내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쪽널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있다. 仁政殿은 昌德宮 外殿의 중심인 법전이며, 國王의 卽位式, 外國 使臣을 맞이하는 의식 臣下들의 賀禮등이 거행되던 공간이다. 王의 자리인 御座와 그 뒤에 나무로 만든 곡병이 쳐져있다. 그리고 이를 두른 日月五峰屛이 보인다. 천장을 보면 두 마리의 鳳凰이 날고 있다. 昌德宮의 日月五峰屛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조금 높게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宣政殿(寶物814호) - 宣政殿은 外殿에 속하는 便殿이다. 便殿이란 임금이 臣下들과 國家의 政治를 논하던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러나 宣政殿은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 국한되지 않고 王妃가 宣政殿에서 養老宴을 베풀었으며 또한 成宗 8년(1477) 3월에 王妃가 첫 親蠶禮를 행한 이후에宣政殿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文臣 그리고 成均館儒生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明宗 8년(1533)에는 文貞王后가 垂簾聽政을 하기도 했다. 현재 宮闕에 남아있는 殿閣가운데 유일한 청기와 지붕이다. 熙政堂(寶物 815호) - 熙政堂은 王의 寢殿으로 사용되었다가, 純祖代에 이르러서는 便殿으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純祖 30년 5월에는 曉明世子(후에 익종으로 추존)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高宗이 景福宮 완공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熙政堂의 옛 모습은 1920년 재건되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관의 남행각에 현관을 만들고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으며 내부에 카펫과 서양식 가구가 놓이는 등 洋式으로 변형되었다. 熙政堂 응접실 벽에는 1920년 가을 純宗의 命을 받아 海剛 金奎鎭이 그린 叢石亭絶景圖와 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동편과 서편에 각각 그려져 있다. 大造殿(寶物 816호) - 宮闕의 內殿에서 가장 중심이 되며, 王妃의 寢殿이다. 현재의 大造殿은 1920년 景福宮의 交泰殿을 헐고 그 부재를옮겨서 재건하였다. 大廳마루를 가운데 두고 王妃의 寢殿인 서온돌과 임금의 寢殿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大造殿의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無樑閣지붕으로 되어있다. 景福宮의 康寧殿 交泰殿, 그리고 昌慶宮의 通明殿등 용마루가 없는 殿閣들은 대부분 王 또는 王妃의 寢殿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용으로 상징되는 왕의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誠正閣 - 임금의 다음 寶位를 이을 世子가 머물던 곳을 東宮, 혹은 春宮이라 불리웠다 誠正閣은 世子가 학문을 연마하며 書筵(皇太子나 王世子를위한 교육제도)을 열던 곳이다. 그러나 1920년 昌德宮을 재건하면서 원래 仁政殿 서편에< 있던 內醫院(典醫社로 개칭)을 이곳으로 옮겨 內醫院용도로 사용했다. 보춘정은 誠正閣의 부속건물로서 서책을 보관하던 장소로 짐작되고 있다. 上凉亭은 六角型의 돌기둥으로 누마루를 떠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六角型의 나무 기둥을 세웠다. 樓閣 주변의 용마루에는 보화당초문양이 투각된 계자난간이 화려하게 둘러져 있다. 내부는 출목도리가 없는 점이 특이하며 매우 화려한 단청과 문양으로 치장되어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켰으며 육각형 모양의 소란반자에는 두 마리의 학이 노니는 모습을 마치 동양화처럼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上凉亭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만큼이나 樂善齋 뒤편 언덕 위에 조성된 이곳 上凉亭 주변의 자연풍광은 지금보다 매우 뛰어났다. 滿月門 - 上凉亭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이며 전돌로 동그란 모양의 출입구를 내었다. 둥그런 만월문을 통해 바라보면 멀리 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흡사 滿月門은 둥그런 액자요, 白岳은 그 속에 그려진 한 폭의 山水畵같다. 滿月門의 담장 양편에는 吉祥무늬와 꽃무늬로 매우 화려한 꽃담이 펼쳐진다. 이곳은 아직 非公開地域으로 復元中에 있다. 樂善齋의 正門 - 樂善齋의 正門은 長樂門으로 長樂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있다'는 뜻이라 한다. 長樂門 앞에 서서 樂善齋 영역을 들여다보면 한 폭의 그림이액자에 담겨 있는 듯 하다. 한편 長樂은 神仙이 살던 月宮을 뜻하기도 하니 이는곧 仙界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長樂門 현판은 大院君章) 낙관이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興善大院君이 썼음을 알 수 있다. 樂善齋 - 원래는 昌慶宮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현재는 昌德宮 영역에 속해있다. 1847년(憲宗 13년) 後宮 金씨의 처소로 지은 곳이다. 현재 樂善齋 구역은 樂善齋와 석복헌, 수강재와그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1997년 樂善齋에 지었던 왜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樂善齋 뒤편은 아기자기하게 꾸민 花階(꽃계단)와꽃담을 괴석을 비롯하여 石盆, 蓮池 등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承華樓, 三三窩, 七分序 - 上凉亭과 滿月門 담장 사이에 놓여 있다. 大造殿 뒤편 花階 庭園에서 뒷산으로 통하는 門 - 大造殿花階와 庭園은 아직 非公開地域이다. 부용지로 넘어가는 길의 단풍 芙蓉池 - 현재 芙蓉池 입구는 昌德宮 後苑의 초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부터 昌德宮 後苑이 시작되며 後苑의 곳곳에는 수많은 亭子閣들이 곳곳에 자리하고있다. 景福宮이나 昌德宮, 昌慶宮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後苑은 모두 단순한 휴식공간만은 아니었다. 後苑은 王室 家族들의 休息空間뿐만 아니라, 王과 王子들의 학문연마 및 심신 단련, 기타 인재 양성을 위한 과거 시험그리고 農事 및 養蠶體驗이나 宮中文學의 産室로도 이용되던 곳이 바로 後苑이었다. 부용정(芙蓉亭) - 芙蓉亭은 肅宗 33년(1707) 건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澤水齋였다. |
2008.04.24 09:55:57 (*.27.111.109)
우리가 비원 이라고만 알았던 창덕궁이
이렇게도 알알이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古宮이라는것을 미처 몰랐어요.
학생때는 소풍 가서,지금은 심심 할때
놀러가는 정도였으니까요.
부끄럽네요.
역사 재 인식의 계기로 삼을께요.
이렇게도 알알이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古宮이라는것을 미처 몰랐어요.
학생때는 소풍 가서,지금은 심심 할때
놀러가는 정도였으니까요.
부끄럽네요.
역사 재 인식의 계기로 삼을께요.
2008.05.04 15:27:10 (*.171.176.166)
중고교시절 소풍이나 백일장등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사 바로알기가 필요한듯 싶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역사 바로알기가 필요한듯 싶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