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 화신, 4·19혁명의 횃불로 부활한 김주열의 주검 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 27일 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던김주열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바다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온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당시 37세)기자가 김주열의 시신을 단독으로 촬영, 보도한 사진 한 장이 전 국민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질렀음은 물론 AP통신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져 지구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당시 발행된 전국의 모든 일간지는 물론 다음과 같은 논문집과 중요 자료집에도 김주열과 관련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허종 기자가 찍은 김주열 시신(옆의 사진)
  • 4·19혁명론 1’(일월서각) 34~39쪽 마산2차 의거
  • 3·15의거’(3·15의거상이자회, 4·19의거상이자회 경남지부 편)146~157 쪽 김주열 그 화려한 주검
  • ‘3·15 의거사’(사단법인 3.15기념사업회편) 340~350쪽, 김주열 그 화려한 주검
  • ‘김주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3~75쪽 147~156쪽 바다에서 떠오른 소년. 김주열의 시체유기 전말


●1960년 4월11일 오전11시30분 마산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 시신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기자 특종사진

 

1. 열사는 1944년 10월7일 부친 김재계, 모친 권찬주여사와의 슬하에서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태어났다.

2.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6회), 1959년 금지중학교(6회)를 졸업하고 같은 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용성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으나 그 해 7월 퇴학, 당시 가세가 기울어 부득이 선택한 학교였기에 적성과 진로가 맞지 않은 진학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잠시 재수를 준비했다.

3. 1960년 그 당시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이 몰려들어 명문고로 손꼽히던 교통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은행원이 되어 가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지인의 권유로 마산 상업고등학교에 응시, 합격자 발표를 확인과 유학준비를 위하여 마산 이모할머니 댁에 간것이 역사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4.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독재정권의 악랄한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시민들이 봉기하여 거리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밤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개표장인 마산시청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 열사는 경찰의 총탄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던 시위대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마산 무학초등학교 근처에서 산화했다.
시위대가 흩어진 후 경찰은 참혹한 모습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열사 시신에 돌을 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이날 거리 곳곳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희생된 민주열사들이 여럿이었다.
열사는 이후 27일 동안 행방불명되었다.

5. 행불소식을 접한 어머니 권찬주여사는 바로 마산으로 달려와 관계기관은 물론 마산의 시장바닥과 골목골목을 헤매며 열사를 찾아달라 호소했고, 시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대로 마산 시청의 연못을 다 퍼냈으나 허탕. 아들을 애타게 찾는 권찬주 여사의 애절한 사연이 마산시민들의 심금을 울렸고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다.


● 아들의 묘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권찬주여사

 

6. 전국을 뒤흔들었던 3.15 의거를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가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최후발악적 탄압으로 민심은 더욱 흉흉했고, 겉으로는 불안한 침묵이 계속되던 중. 4월11일, 행방불명 27일만에 열사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올랐다.
거룻배를 타고 홍합을 채취하던 한 어부에 의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발견의 긴급 정보를 접한 부산일보 허종 기자는 옷 속에 사진기를 숨기고 경찰들 몰래 사진을 찍었다.
이 참혹한 열사의 사진 한장이 전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하고 분노케 했다.

7. 마산도립병원에서 열사의 참혹한 시신을 확인한 마산시민들의 분노는 2차 마산시민 항재으로 터졌다.
이날 마산시민봉기의 거센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을 이루었고 독재자 이승만은 4월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8. 3월15일 밤 열사는 독재의 억압과 불의, 부정, 부패에 항거한 마산시민항쟁에 이름없는 의로운 한 청녀학생으로 참여하였으나 열사가 민주의 횃불로 부활한 4월11일, 바로 그날부터 4월 혁명의 선봉장이 되어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역사를 만든 인물이 되었다.

9. 3.15의거가 청사에 길이 빛나는 역사가 된것은 4.19때문이며 4월혁명은 4.11마산시민항쟁으로 쟁취한 위대한 민중승리의 역사이다.

김주열 열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주혁명의 횃불로 자유, 민주,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있다.



● 김주열 열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