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드라마 주제가 (1) - 여로(旅路)
글 : 이영미

식민지와 전쟁 세대의 복고풍 드라마
                          - 이남섭 작 <여로>

한동안 구세대와 신세대를 가르는 퀴즈가 있었다. 예컨대 코미디언 이기동을 알면 구세대, 모르면 신세대라든가, ‘캔디’ 노래를 애니메이션 <들장미 소녀 캔디>의 주제가로 생각하면 구세대, HOT의 노래로 생각하면 신세대라는 식이다. 그런 방식으로 머리에 기계충 구멍이 난 ‘영구’란 인물과 그가 부르는 노래를 무엇으로 기억하는가에 따라 세대 구분이 가능할 듯하다. 아마 지금의 30대까지는 심형래와 ‘소쩍꿍 소쩍꿍’ 하는 <낭랑 십팔세>를 떠올릴 것이나, 40대 이상의 중년이라면 그 코미디의 저본이 된 드라마 <여로>의 영구 장욱제와 ‘봄이 왔네 봄이 와’로 시작하는 <처녀총각>을 떠올릴 것이다.

<여로>(이남섭 작,연출)는 십수 년이 지난 후에 코미디로 리메이크 될 정도로 엄청나게 인기를 모은 드라마였다. 물론 이런 일일극 바람은 <여로>가 처음은 아니다. 세 채널 중 뒤늦게 출발한 MBC가 1969년 <개구리 남편>이라는 불륜 소재 일일극으로 포문을 열고, 1970년 TBC가 <아씨> (▶ 들어보기)로 일일극의 관행을 굳힌 후, 1972년 KBS가 <여로>로 최고 인기 일일극을 성공시키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여로>가 <아씨>의 성공에 힘입어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시대부터 6.25를 거쳐 1960년대 즈음까지를 훑는 복고풍 드라마라는 발상이 동일하며, 무엇보다도 지지리 고생하며 이 시대를 살아낸 현모양처가 주인공이라는 점 역시 동일하다. 이는 이때 막 텔레비전 앞에 안기 시작한 당시의 중노년층 여성관객들에게 엄청나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은 될 거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이 시대 어머니, 할머니들의 고생 이야기들을 총망라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일극의 특성상 줄거리를 자세히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대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영상물도 한두 회분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행히 대본을 고스란히 풀어놓은 듯한 리라이팅 소설 <여로>(인문출판사, 1973)이 남아 있어 작품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분이(태현실 분)는 돈에 팔리다시피 부잣집 최주사 댁의 바보 총각 영구(장욱제 분)에게 시집을 오는데, 시아버지(정민 분)는 인자하고 현명하건만 재산이 아들 영구에게로 갈 것을 우려한 계모 시어머니(박주아 분), 이복 시누이(권미혜 분)는 끊임없이 분이를 내쫓으려는 시도를 하여 극악하게 괴롭힘을 당한다. 게다가 분이를 유곽에서 빼내어 이 집에 팔아먹은 달중이는 분이의 전력을 빌미로 삼아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여기에 최주사 친구의 아들인 상준(최정훈 분)이 독립운동가가 되어 집에 머슴으로 숨어 있고, 이를 잡으려는 일본 형사들의 괴롭힘(수색, 연행, 고문 등)이 중반부 고난의 핵심을 이룬다. 시아버지가 고문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된 틈을 타, 시어머니와 달중이가 분이의 과거를 폭로함으로써 분이는 쫓겨난다. 종반부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전쟁 중 영구와 아들 기웅이의 구두닦이로 연명하는 비참한 최주사 가족과, 억척스레 돈을 모아 작은 식당을 연 분이가 아슬아슬 만나지 못한 채 부산에서 살고, 여기에 군인이 된 상준이 묘한 삼각관계의 긴장감이 극을 이끌어간다.


팔려가는 효녀와 떳떳지 못한 과거에 발목잡힌 여자, 못된 시어머니와 바보 신랑, 억척녀의 가정 재건립, 여기에 독립운동 소재의 활극적 요소까지, 대중물의 주요 흥행요소가 총망라되었으니, 당시 대중들이 오금 저리게 좋아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결말 처리도 아주 대중적이다. 아들 기웅이 대학에 수석입학을 하면서 식당으로 억대 부자가 된 분이가 가족들과 만나고, 못된 인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개과천선하고, 분이의 재산으로 고향에 땅과 집을 도로 사서 예전처럼 그 집에 모여사는 이야기로 끝을 맺으니(심지어 청지기 김서방과 여종 딸끈이까지도 모두 모인다), 시청자가 원하는 모든 욕구를 깨끗하게 해결하고 끝맺는다.


태현실이 연기한 분이의 인물형은 <아씨>의 주인공과 흡사하면서도 다르다. 지금의 감각으로서는 답답할 정도로 얌전한 이미지를 지닌 김희준의 아씨는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 올 정도로 번듯한 양가집 규수로, 시집살이의 고통 속에서도 시종 소극적인 인내로 견디는 청순가련형 현모양처이다. 그에 비해 <여로>의 분이는 바보 남편에게 글을 가르치고 상준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결국은 사업에 성공하여 집안을 재건하는 등, 1960년대 영화 속 최은희를 연상시킬 정도로 인내심과 지혜, 강한 생활력을 겸비한 1960년대식 수퍼우먼으로 그려진다. 그러니 김희준보다는 태현실 이미지에 딱 맞는다.


이남섭은 KBS의 연출자로 자신의 연출작품을 종종 집필했는데, 확실히 이 작품은 작가적 문필력보다는 한 회 한 회를 긴박한 사건들로 끌어가는 연출가적 감각이 돋보인다. 그는 <아들 낳고 딸 낳고>(1971) 등 코믹한 분위기의 작품을 잘 썼는데, 그의 아내가 <사또 돌쇠>(역시 그의 자작연출이다)에서 돌쇠 장욱제와 컴비를 이룬 갑분이 김난영임을 생각하면, 그가 좋아하는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가사를 쓴 주제가는 이미자가 불렀고, 당시 이미자 노래의 상당수를 작곡한 백영호가 작곡했으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오래 기억에 남았으나 그래도 드라마의 인기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다. 


여로[이미자] (▶ 들어보기)    李南燮 作詞/ 白映湖 作曲

1. 그 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땐
   봄나비 나래 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
   나르는 낙엽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
   무심한 강물 위에 잔주름 여울 지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2. 언젠가 오랜 옛날 볼우물 예뻤을 때
   뛰는 가슴 사랑으로 부푼 적도 있었는데
   흐르는 세월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네
   무심한 강바람에 흰 머리 나부끼고
   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문예』2006.10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