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0 게시판 - 지나온 시절에 대한 글, 추억담을 남기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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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부부가수 1호,
타향살이로 국민을 울린 알뜰한 당신네들의 삶 온 국민이 좋아 하는 대중가요 ' 타향살이'의 주인공 고복수.
그는 신인 가수 경연 대회 입상을 통해 데뷔한 최초의 가수로 기록되어 있다.
고향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 주는 대중 가요의 대명사 ‘타향살이'가 처음 음반으로 발표된 것이
1934년 12월. 꼭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 알뜰한 당신'으로 유명한 황금심은 그의 부인.
스타부부 1호라 할 만큼 두 사람은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금실 좋고 모범적인 삶으로 후배들에겐 귀감이 된 삶을 살았다.
고복수는 경남 울산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는 가정에서 1912년 12월 태어났다.
키 크고 얌전하던 그는 마을 뒷산 언덕에 올라 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 했다.
울산 병영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5학년초 부산 내성초등학교로 전학해 그곳에서 줄곧 성장했다.
보통학교 시절 이미 남다른 음악적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노래를 배우기 위해 울산 장로교 합창단에 들어 갔다.
당시는 음악 학원이나 개인 교습소가 없던 시절.
고복수는 교회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연주를 익혔다.
이후 ‘ 창가 잘 부르는 학생'으로 소문난 그는 울산실업중학에 특채로 입학하고 1930년 부산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1932년 콜럼비아 레코드사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가 사상 최초로 열렸다.
대부분 인기 배우나 기생들이 가수로 나섰던 당시,
‘ 참신한 신인 발굴을 통해 음반 예술의 위상을 높여 보자'는 취지로 전국 9개 도시에서 예선대회가 치러졌다.
노래 잘하는 23살의 청년 고복수는 부산 경남 예선에 참가해 1등을 했다.
9개 도시에서 3위까지의 입상자 27명이 최종 경합을 벌이는 전국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친의 가게에서 거금 60원을 훔쳐 단신으로 상경했다.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이 노래한 ‘ 비연'이 지정곡이었고 자유곡으로 ‘ 낙화암'을 부른 결과는 남자로는 유일한 2위 입상이었다.
당시 1위는 정일경, 3위는 조금자였다.
당시는 유행가라기보다는 가곡 형식의 노래들로 심사위원들도 홍난파, 현제명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입상을 했지만 여자가수인 정일경, 조금자만 특별 방송 출연과 요란한 취입 곡 홍보 등으로 관심이 쏟아졌을 뿐 고복수는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1934년 4월 동아일보 학예부가 주최한 ‘당선가 발표 음악대회’가 소공동 공회당에서 열렸다.
입상 신인 가수들 보다 전옥 등 찬조 출연자들이 대단했다.
고복수는 ‘ 서울의 노래', ‘ 비연', ‘ 소쩍새 우는 밤'을 불렀다.
이때 콜롬비아의 경쟁회사인 OKHE 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고복수의 노래를 듣고 반해 버렸다.
콜롬비아의 인기가수 채규엽, 강홍식에 필적하는 남자가수로 그는 고복수를 스카우트 했다.
1934년 12월, 요란한 선전 문구를 앞세우고 그의 데뷔 SP 음반이 발표되었다.
손목인 곡인 타이틀곡 ‘ 이원애곡'과 ‘ 타향' 등 2곡을 수록한 음반은 단시일에 2만장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타이틀곡 보다 뒷면 ‘ 타향'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빅히트가 터지자 고복수는 전속 축하금으로 거금 1천원을 거머쥐게 되었다.
타향살이로 국민을 울린 알뜰한 당신네들의 삶
1935년 1월 ‘ 고독한 꿈', 2월 ‘ 오 새벽이로다', 4월 ‘ 사막의 한', 5월 ‘ 바다 넘어' 등을 매달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OKHE레코드는 ‘ 목포의 눈물' 이난영과 ' 타향',' 휘파람' 등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고복수를 주력 가수로 삼았다.
1937년 1월에 발표한 ‘ 짝사랑'에 이어
39년 4월 ‘ 제2 타향'을 내놓았을 때까지 ‘ 타향'은 이미 5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노래 뿐 아니라 훤칠한 키에 항상 연미복을 쭉 빼어 입은 말쑥한 용모로 무대에 올라 여성 팬들의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고복수는 2살 어린 작곡가 손목인의 노래를 주로 불렀는데 죽을 때도 그를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모셨다.
손목인은 "한때는 극장 앞에 장안의 한다 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10여대씩 늘어 섰었다. 만나 주질 않아 머리가 돌아 버린 여인이 '고복수'의 이름을 외치면서 돌아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1937년 혜성처럼 등장한 남인수와 김정구 등에 밀려 고복수의 인기는 물러 나기 시작했다.
데뷔곡이자 대표 곡인 '타향'은 1940년대 이후 '타향살이'로 제목이 바뀌어 불려졌다.
1939년, 3년 간의 연애 끝에 10살 아래 19살의 빅타레코드사 신인가수 황금심과 결혼을 했다.
'알뜰한 당신', '삼다도 소식'으로 유명한 황금심은 30년 넘는 부부생활 중에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고 선생님으로 남편을 호칭했다고 전해진다.
1921년 12월 10일 서울 영천에서 태어난 황금심(본명 황금동)은 예쁜 목소리와 외모, 그리고 얌전한 성격으로 동네의 귀염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1934년 덕수보통학교 5학년 때 청진동 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동네 음반 가게 점원이 지나 가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반했다.
그의 주선으로 OKEH레코드 봄 전속 가수 선발 모집에 응모해 20명 중 혼자 뽑혔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4세. 16세 때 '왜 못 오시나요'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취입했다.
이 노래를 듣고 반한 작사가 이부풍의 주선으로 빅타레코드로 스카웃이 되었다.
이부풍은 그녀에게 황금심이란 예명을 지어주며
전속 작곡가 전수린과 콤비를 이뤄 대표 곡 '알뜰한 당신' 취입을 주선했다.
이 음반이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 노래'시스템은 빅타레코드의 '히트 제조 트리오'로 자리를 잡았다.
뒤늦게 장래성 있는 가수를 빼앗긴 OKHE레코드는 황금심을 2중 계약자로 몰아 법정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스타부부가수 1호, 문화침탈의 역사 겪어내며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 남겨 소속사 분쟁의 최종 승자는 빅타레코드.
이에 O.KHE레코드는 이미 녹음해 두었던 '왜 못 오시나요'를 '황금자'란 이름으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음반 뒷면에 수록해 발매하며 분풀이를 했다.
이때가 1937년 말.
O.KHE레코드 소속시절 착하고 예쁘게 생긴 황금심을 본 노총각 고복수는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구식 한국여성의 표본인 황금심이었지만 노총각 인기가수와의 사랑을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을 하고 혼전 임신까지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1939년 빅타레코드는 공연단체 '반도악극좌'를 구성했다.
황금심은 최고 스타였고 남편 고복수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순회공연에 참가했다.
원로 가수 신카나리아씨는 "황금심 그이는 너무 고왔어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서면 아휴, 같은 여자들도 탄성을 질렀지요"라고 회고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고복수부부는 성전 완수를 부르짖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눈물의 여왕 전옥이 주관하는 남해위문대 무대에 올라 고복수는 장고를 치고 황금심은 꽹과리를 두들기며 일본어 노래를 불러야 했다.
‘타향살이’는 멜로디 자체가 짧고 쉬워 대중들도 한번만 들으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일제 강점 하에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 ‘타향살이’를 듣고 부르면서 설움을 달랬다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만주 하얼빈 공연 때.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고, 무려 열 번이나 ‘타향살이’를 불러야 했다.
간도 공연 때는 부산이 고향인 중년여인이 찾아 와 “남편이 전쟁통에 죽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향에도 한번 못 가보는 신세”라고 울먹였다. 이 여인은 감정이 격해져 끝내 자살을 해버렸을 만큼 타향살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처럼 고복수부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다.
스타부부가수 1호, 문화침탈의 역사 겪어내며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 남겨
한국전쟁 때 고복수는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북진하던 국군 낙하산 부대원들에 의해 포로수용소행 일보 직전에 구출한 사연도 있다. 이후 그는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군 위문 연예대원으로 활동했다.
1.4후퇴 때 이들 부부는 피난지인 대구에서 '해피'라는 이름의 다방 경영과 쇼 공연을 기획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황금심은 오랜만에 박시춘곡 '삼다도 소식'을 발표하면서 가히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마이크보다 육성공연을 고집했던 황금심은 1950년대까지 무려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1960년 아시아 영화제에 초대가수로 무대에 올랐다.
1958년 가을 명동 시공관무대. 고복수는 후배가수들의 도움으로 가수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은퇴공연을 열었다.
은퇴 후 '동화예술학원'을 창설했다.
'대전블루스'의 오리지널 가수 안정애와 '동백아가씨'의 이미자는 이곳을 거쳐간 대표적인 가수.
이후 택시사업에 이어 거금 3천 6백만 환을 투자해 '타향살이'의 영화를 제작해 빚더미에 앉았다.
고복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적외판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1972년 2월 10일 회갑을 맞은 그는 고혈압으로 연세대 의료원에서 세상을 등졌다.
극진한 내조로 유명한 황금심은 사업에 실패, 서적외판원을 하는 신세가 됐던 남편 고복수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눈물겨운 간호를 했다.
수유리에서 민속주점 '타향살이'를 운영하던 82년 10월, 신인가수 전미경은 존경하는 선배가수 황금심의 일생을 '들국화'로 헌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울산시는 1987년 12월 전통가요의 계승발전을 위해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 1회 최우수 남녀가수로 나훈아와 이미자를 선정했었다. 이후 MBC에서도 고복수 가요제를 열기도 했다.
1991년 6월, KBS의 주관으로 러시아 알마아타에서 열린 교포위문공연.
고복수의 아들인 트로트 가수 고영준이 무대에 올라 '타향살이' 불렀다.
놀랍게도 러시아 교포들 모두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이내 공연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고영준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고영준과 둘째 며느리 손현희는 가수로 활동했고 셋째 아들 고병준씨는 SBS 인기사극으로 사랑 받았던 "여인천하"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2대에 걸쳐 음악계보를 잇고 있다.
음악감독인 고병준은 MBC 특집 미니시리즈 ‘다모’의 음악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91년 10월 울산시는 2천만 원의 시비를 들여 중구 북정동 북정공원에 ‘고복수 노래비를 건립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황금심은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93년엔 '삼다도소식'으로 한국가요창작인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세상을 등지고 용인 카톨릭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작년 8월엔 울산시에서 울산시 병영2동에 '고복수 마을'과 '고복수 길'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대중가수의 이름을 딴 마을과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보기 드문 케이스다.
고복수.황금심 부부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공적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계의 1호 스타부부라는 사실을 뛰어넘는 큰 의미가 부여된다. (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
[ 출처: 주간한국 추억의 LP( https://weekly.hankooki.com/enter/oldlp.htm ) 20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