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님은 갔습니다
2010년 3월 13일 대한민국 조계종 청정 비구 법정(法頂) 스님의 다비식.
“스님! 불 들어갑니다.”
애절한 함성은 하늘을 울리고 불꽃은 춤을 추었다.
아아, 님은 가셨다. 춘삼월 봄꽃들의 미소를 등진 채, 길상사, 송광사
흙길을 밟아 불국토로 훌훌히 떠나셨다.
야속하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차마 버리셨다, 슬프다. 미망과 아집과
독선에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차마 떨치셨다.
법정 스님. 30여 권에 달하는 저서로 상구보리(上求菩提)에 힘쓰시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현시킨 분이다.
문학의 장르인 수필로 쓴 책
‘무소유’, ‘서 있는 사람들’,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 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오두막 편지’ 등 여러 권과 ‘깨달음의 거울’, 등
역서(譯書), ‘아름다운 마무리’ 같은 명상집, ‘일기일회’ 같은 법문집,
기타 잠언집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사찰 법당 법석(法席)에서의 법정 스님의 설법과 법문이 중생들의 귀를
통한 법음(法音)으로써, 깨침이 되고, 영약이 되고, 감로수가 되었다면,
법정 스님의 저서와 작품들은 중생들의 눈을 통한 법어(法語)로써
마음의 양식이 되고, 생활의 철학이 되고, 삶의 길라잡이가 기꺼이
되어주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기쁘지 아니한가! 불교계 한 승려의 글이 불교신자,
비신자, 승려, 목사, 신부, 기독교인, 천주교인 등 승속을 초월하여
두루 읽히고, 사랑받고 있다.
당신의 말씀과 저서들을 스스로
“풀어놓은 말빚”이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글빛’이 되어 세인들에게
금언이 되고 잠언이 되고 명언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생을 마감하실 적에 이렇게 일러주셨다.
“ 나 죽은 후에 탑도 세우지 말고, 부도도 세우지 말고,
사리도 찾지 말라.”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다 알고 있다. 불일암이 곧 부도이며,
강원도 오두막이 곧 사리이며, 길상사가 곧 탑과 다르지 않음을
말이다. 또 우리 중생들은 다 느끼고 있다.
스님의 육신은 비록
산중에서 외로이 머물렀지만 늘 마음은 세간의 미혹한 중생과
더불어 사셨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이라도 ‘무소유’를 생활해야겠다.
소유의 뜻도, 무소유의
경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의 인간들에게 이 말씀은
쓰나미처럼 다가왔고 큰 지진처럼 넋을 흔들고 망치로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무소유’ 라는 한 마디 법어로
탐진치(貪瞋癡)에 찌든 생활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선각자가
일찍이 있었을까? ‘무소유’ 라는 한 마디 법어로 생활인에게 삶의
길과 방법을 일깨워준 선지자가 일찍이 있었을까?
입적에 이르러 그분이 남긴 여러 유언들. 의례적인 장례식과 관과
수의, 저서 처리와 출판, 다비식에 관한 당부나 부탁에 목이 멘다.
시인 이형기님의 시 ‘낙화’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처럼 그분의
낙화(落花)는 아름답기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진실하신가!
얼마나 선량하신가! 얼마나 성스러우신가!
스님이면 다 스님이 아니다. 스님다운 스님이 스님이다. 그렇다.
스님 중에서도 스님이시다. 이 암울한 시대에 그분은 사회의 등불이며,
승려의 사표이며, 시대의 스승이었다.
아아, 님은 가셨다. 그러나 님의 향기는 갈수록 짙어지고, 님의 발자취는
갈수록 또렷해지고, 님의 목소리는 갈수록 가까이 들리니 어이할 꺼나.
아아, 님은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이면 거자필반(去者必返)이기에 스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련다.
=수필가, 평론가/ '김경남' 님의 수필집에서=
말이 없는 남자와 말이 많은 여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친구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는 정말로 시끄럽군요
그러자 남편은 대답 했지요
나의 아내의 소리가 아름답기 그지 없답니다.
하루종일 노래하는 종달새 소리가 시끄럽게 들립니까?
아내친구가 아내에게 말했지요
당신 남편은 너무나 무뚝뚝하군요
차라리 돌과 함께 사는게 났겠어요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믿음직한 모습이에요
제 남편은 말은 없지만
아주 따뜻하고 진실하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을 사랑하지요.
정말 따뜻한 마음입니다.
따뜻하고 정감있는 마음으로
이 한주일을 시작합시다.
September.16.2012 深谷강문학 입니다˝"`˚♣♡♨
만리장성을 오르며...
만리장성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자 중국 고대의
중요한 군사시설로 방어용 성벽이다. 사실 10리는 4km로, 계산적으로
만리(萬里)는 4,000km가 되지만 만리장성은 4,000km가 훨씬 넘는
거리이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긴 성(城)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이다. 그리고 모택동 이 만리장성에서 일찍이 “장성을 오르지
않고서는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 없다
(不到長城非好漢)”이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하고, ‘달에서도 유일하게 보이는 인공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달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만리장성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1987년 등록되었다.
만리장성 위치도
만리장성은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져 있으며하지만 더 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며 연장된
길이 2,700㎞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입니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015미터이며, 산세가 험준한 편입니다.
장성 위에서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천만m에 이릅니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습니다.
오늘날 말하는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嘉浴館)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때 지어진 것들이며,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입니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만리장성은 한번에 쌓아진 것이 아닙니다. 수십, 수백, 수천년에
걸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사실 관광지로서
유명한 오늘날 우리가 만리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진나라때
쌓은 장성 유지가 아니라 명나라때 수축,
보완되어 완성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벽이나 기타 시설물 등 보이는 광경만을 보고
진나라 특히 시황제의 업적이라고들 하는데요...
이것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현재의 만리장성의 기본적인 바탕은 물론 진제국 시기에
흉노족을 비롯한 내몽고지역의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을
견제하고자 시황제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제국 시기의 만리장성조차 원래는 춘추전국시대,
특히 전국시대의 조나라와 연나라의 장성을 서로 연결시켜
보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만리장성과 현재의
만리장성은 전반적인 위치는 대략 일치하고 있으나
전체 구간 길이 그 동,서,남,북의 양끝과 가지를 이루는
성곽들의 구체적인 위치는 상당히 다릅니다.
특히 만리장성의 동단은 현재의 하북성 발해만의
산해관입니다. 중국에서는 요령성 동부의 단동지구까지
포함시켜 고대부터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다스린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요동동부지역에 있는 성곽은
이전 시기에 있던 성곽을 구간별로 연결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진시황제때의 만리장성과는
무관합니다.
심지어 중국인들은 한반도의
청천강유역까지 만리장성이 닿아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곳의 관광가이드들은 한국인을 비롯한
세계의 관광객들에게 마치 고대부터 중국의 만리장성이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많은 한국인들조차 별다른 생각없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사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수축한 이유는 북방의
흉노족을 방비하고자 함도 있었지만 무리한
통일전쟁과정에서 진나라가 복속한 지역의 주민들을,
특히 진나라에 저항하다가
투옥된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냥 처형하기보다는 그들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장성을 쌓고, 도로를 정비하는
등의 국가사업 달성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즉 장성도 쌓고 불순세력(?)을 제거하는 1석 2조의
정책을 추진한 것이죠... 따라서 수백만의 주민들이
죽어가는 것은 오히려 시황제에게는 반가운 일이었고,
때문에 성을 쌓다가 부상당한 사람들까지 모두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란 진시황제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수백만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서 만들어진
"고통의 성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만리장성은 지속적으로 보완되는데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만의 주민들이 강제로 사역당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가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실권자에 반대하는 '역적'이라는
오명하에 죽어간 것이죠. 장비로도 쌓기 어려웠을 것
같지만 수백년에 걸쳐 보완된 것이니 그리 또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름없이 죽어간 수천만
주민들의 '한'으로 이루어진 성벽 벽돌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리장성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제일망정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결국 달에서도 보일정도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
놓게되었다는 점이지 결코 진시황제의 "업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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