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어요. 코코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이토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을 가는 순간이었지요. 안중근 의사는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비서관 모리 등 3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뒤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숨은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가 근래에 들어 뒤늦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안의사의 용감한 삶의 이면에는 아들만큼이나 용감하고 나라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사살한 뒤 뤼순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조 여사는 1910년 2월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 의사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했다.
열사의 어머니, 조 여사의 삶과 활동을 조명한 3.1여성동지회 박용옥 회장의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의 항일구국적 생애" 논문에서 "안중근이란 인물을 만든 것은 그 어머니의 '모성리더십' 이었다" 고 주장하고 있다. 조 여사는 국채보상운동 때 자신의 패물을 선뜻 내놓아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29일자 의연자 명단에 올랐다. 그해 안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 때 조 여사는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고 격려했다. 2년 뒤 안 의사가 이토 통감을 사살하고 수감됐을 때는 안 의사 동생들을 보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고 전했다. 또 사형이 선고된 뒤 편지와 함께 명주 수의를 보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26일 그 수의를 입은채 형집행을 당했다.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대한의 남아답게 용감히 죽음을 맞으라고 사형대의 수의를 지어주면서 편지를 쓰는 어머니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조마리아여사 마음에는 무엇에 대한 확신이 있었길래 그렇게 강한 어머니로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를 통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의 무사안일한 무조건식 자식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