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봄볕에 그을리고

/시현

봄 빛살이 지루함을 벗어버린 나무가지 끝에서
시름시스레 지난 세월의 잔인함을 되삭임하고
단말마(斷末摩) 허기진 아우슈비츠의 외침들
거렁이며 끓어대는 나른한 허공속을 비틀거리면
하릴없이 타는 목마름으로 푸석해진 하늘도
다가설 수 없는 친근함을 어설피 쏟아내지.



잡히지 않는 그리움 가맣게 그을리는 들녘으로
누이는 뜻모를 봄볕을 안고 안으로 안으로 타들고
눈에 밟힌 앞 산은 바람앞에 너울거려 아득하고
꿈길따라 밟고가던 굽은 들길 낯설어 멀구나.
솜털 가슴에 소쩍새는 밤새워 울음을 토해내고
민둥한 산기슭에 진달래 붉기만 더욱하여
고개 돌려 먼하늘 바라보고 서있어야 한다.



왜 봄을 기다려야 했는지 오늘이 서러운 이유를
눈물에 젖어 퉁퉁부어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묻지 않기로 했었던 그 해 봄 지나가고 묻어버렸던
그 가슴에 여느 봄은 여지없이 찾아와서
살랑거리며 한 줄기 바람 되어 불어가더라.



이렇게 흔들리며 산다는 것, 비워둔 목마름에 있음을
아쉬워 못내 그리고 있음을 봄이 와서야 알았을까?
나는 봄볕에 그을리고 있는데 마른풀잎 새로 비틀거리며
기억속을 솟아오르는 모진 눈물이 한 세상 무늬로 얼룩지고 있다.

(0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