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기업 열전] 독한 소주판, 순하게 잡아라

[2008.09.26 제728호]

‘참이슬’에 싸움을 건 ‘처음처럼’, 소주의 계절에 대격돌하는 진로 vs 두산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애주가는 ‘찰랑찰랑’ 소주잔을 채우고 싶어진다.
‘캬~’ 소리가 절로 난다. 여름이 맥주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소주의 계절이다.
 
넘칠 만큼 채워도 52∼55㎖쯤 되는 좁은 공간인 소주잔을 놓고 서민들은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 한국 경제에 대해 혀가 꼬부라지도록 얘기하고 얘기한다. 소주잔 앞에서 종교와 정치, 사상은 맞부딪힌다.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은 마구마구 씹힌다.
 

- 진로는 일제강점기부터, 두산은 93년에 진입

» ‘처음처럼’ ‘참이슬 프레시’

경기가 불황일 때 더 잘 팔린다는 소주. 그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고 장학엽 회장이 평남 용강에 ‘진천양조상회’를 세우면서 출발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소주 제조업체는 무려 3200여 개에 이르렀다. 50년대 ‘국민주’는 막걸리였지만 소주는 곧 막걸리를 따라잡는다.

54년 0.3%에 그쳤던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64년 10%로 높아진다. 서민들의 술상에 오르며 막걸리의 인기를 제압한 것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져온 경쟁과 스트레스가 막걸리에 견줘 ‘독한 술’인 소주 소비를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린 게 아닐까.

이때만 해도 진로는 지금처럼 1등 업체가 아니었다. 진로가 희석식 소주를 처음 내놓은 65년만 해도 소주 시장은 삼학의 독무대였다.

진로가 시장의 주도권을 휘어잡은 것은 73년 알코올 도수를 5도나 내린 ‘25도 진로’를 내놓으면서부터다. 진로라는 이름은 75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낙동강’이란 상표였다. 진로(眞露)는 생산지였던 평남 용강군 진지(眞池)면의 ‘진’(眞)자에 소주를 증류할 때 술 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고 해 ‘이슬 로’(露)자를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93년 대기업 두산은 강원도 소주 경월을 인수하며 소주 시장에 뛰어든다. 이듬해 경월 ‘그린’은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진격한다. 그린은 국내 소주 업계 최초로 녹색 병을 썼다. 소주 이름처럼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진로는 1970년대부터 투명한 에메랄드빛 소주병을 사용해왔는데, 결국 98년 ‘참이슬’을 선보이면서 녹색 병으로 바꾸었다. 녹색이 더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고, 투명한 병에 담긴 소주는 독해 보인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맥주는 두산, 소주는 진로’로 각자의 영역을 자리매김하고 있던 두 회사는 90년대 이후 상대의 영역에 너나없이 진출하며 총칼 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92년 진로가 진로쿠어스란 맥주회사를 세운 뒤 두산의 오비맥주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두산도 이에 질세라 경월소주를 인수하며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 무렵 양주시장에서도 진로와 두산은 임페리얼과 패스포트를 각각 내놓고 격돌했다.

위기는 진로에서 시작됐다. 외부의 위기가 아닌 내부의 위기였다. 진로는 90년대 종합그룹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소주 사업뿐 아니라 유통, 제약, 건설, 유선방송 등으로 사업범위를 넓힌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는다.

97년 한때 계열사 24개에 3조원의 그룹매출을 기록했던 진로는 기업 부도라는 최대 위기 상황을 맞는다. 97년 44%였던 시장점유율은 98년 38%로 추락했다.

진로가 승부수로 내놓은 게 바로 ‘참이슬’이다. 알코올 도수 23도짜리 참이슬이 시장에 선보인 것은 98년 10월. 회사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였다. 광고판촉비가 필요했지만 돈이 없었다. 직원들이 몸으로 때웠다.

말단 직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주점·식당·슈퍼마켓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일을 거들어주고, 고객과 직접 만나는 ‘육탄 마케팅’을 펼쳤다.

외환위기로 고통을 받고 있던 서민들은 대나무숯 여과 소주라는 ‘참(眞)이슬(露)’에 빠졌다. 2003년 5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진로는 2005년 6월 하이트맥주를 새 주인으로 맞아들이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 23도, 21도, 19도… 부드러운 술로 윈윈

2000년 이래 두 회사는 소주잔이 깨어질 만큼 맞수 경쟁을 벌인다.

소주는 이미지다. 기호나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들이 벌이는 소주 전쟁은 바로 이미지 전쟁이었다.

1998년 23도 소주,

2001년 녹차소주,

2006년 20도,

2007년 19.5도, 무설탕·소금 소주 논쟁으로 이어졌다.

» 순한 소주 추이

이같은 논쟁은 두산 새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10%대에 진입하는 등 판도 변화가 보일 때 나타났다. 또 소주 성수기인 봄 행락철을 앞둔 2월이나 겨울철이 바짝 다가온 8~9월에 주로 일어났다. 성수기 소주 시장 선점을 위한 기싸움이었다.

이같은 논쟁이 벌어지면 애주가들은 자연스레 소주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소주 업체로선 판촉 활동을 안 하고도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드러운 소주 시대를 연 순한 소주 전쟁은 가장 눈에 띄는 맞수 경쟁이다. 23도이던 알코올 도수를 21도, 그리고 19도로 연이어 낮추면서 순한 소주 전쟁은 이어졌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소주는 톡 쏘는 독한 이미지를 벗고 여성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부드러운 술로 새옷을 갈아입었다.

두 회사 모두 윈윈한 측면도 있다. 값비싼 알코올의 함량을 떨어뜨리면서 수십억원의 생산원가를 줄인 반면, 도수가 낮아진 술의 판매량은 오히려 늘어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도전은 2등 기업의 특권이다. 두산이 도발을 했다. 두산은 2006년 회심의 역작 ‘처음처럼’을 내놓는다. 알칼리 환원수 이미지와 웰빙 트렌드로 소주 시장 6위였던 두산은 단숨에 2위로 올라선다.

19.5도짜리 소주도 그때 나왔다. 진로는 지난 2005년 전국 시장점유율 55.4% 기록을 세운 뒤 두산의 협공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47%대로 떨어졌다.

진로도 19.5도인 ‘참이슬 프레시’를 내놓으면서 대반격을 가했다. 현재 시장점유율은 진로가 51%, 두산이 11% 정도다.

2006년 진로는 자사 제품인 참이슬과 두산의 처음처럼을 비교하는 광고에서 처음처럼이 전기분해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기에 감전되는 위험한 상황이 연상되도록 했다.

두산도 신문광고에서 두 제품을 비교하면서 자사 제품인 처음처럼이 알칼리성 소주 제조의 기준이고 참이슬은 이를 모방한 ‘짝퉁’인 것처럼 표현했다.

그 뒤 진로가 ‘설탕을 뺀 껌, 설탕을 뺀 주스, 설탕을 뺀 소주’라는 광고를 내보내자, 두산은 ‘설탕은 없고 소금도 없다’는 메시지의 포스터 광고를 배포했다.

올해 두 회사는 또다시 큰일을 겪게 된다. 진로는 상장이 폐지된 지 5년 만에 재상장을 추진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난 뒤 11년 만이다. 여기에 진로는 참이슬 프레시 출시 이후 2년 만에 소주 신제품을 내놓는다.

진로는 신제품 홍보를 극대화하기 위해 송혜교를 모델로 기용했다. 진로는 9월24일 롯데호텔에서 윤종웅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신제품 출시 기자간담회를 개최한다. 신제품은 올 하반기 상장을 앞두고 있는 진로의 야심작으로 알려졌다.

9월19일 현재까지 진로 쪽은 “도수, 브랜드 이름 등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 일본 사케, 외국 와인과 글로벌 경쟁도

두산은 주류 사업 매각설이 계속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두산은 매각 사실을 부인하며 주류 부문을 팔 생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산 주류 부문은 소주 시장에서 진로에 이은 2위의 시장점유율(2008년 1분기 12.5%, 수출 포함)과 공격적 마케팅으로 확보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에선 롯데 등의 인수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소주는 우리나라 대표주로 자리매김했지만 술맛을 하나로 통일해 전통주 개발을 뒤처지게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최근에는 일본 술인 사케와 수입 포도주와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소주의 경쟁자는 맥주나 막걸리가 아닌 글로벌 술들인 셈이다.

- 소주 광고 여자 모델 열전

이효리·김아중이 한잔 하자 하네

» 소주 광고 여자 모델 열전. 이효리와 김아중

 

섹시 스타 이효리와 인기 탤런트 김아중. 지난해부터 소주 회사의 광고모델로 맞장을 떴다.

이효리는 두산 ‘처음처럼’의 모델로 나와 섹시한 춤으로 소주병을 흔들어댔다.

김아중은 진로 ‘참이슬 프레시’ 광고에서 약속시간에 늦은 남자친구에게 소주 한잔을 권하며 러브샷을 외쳐댔다.

소주업계의 모델에는 1960~70년대만 해도 서영춘, 민지환 등 서민적인 이미지의 남자 연예인이 주로 기용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여성 모델이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이영애·구혜선·김아중·이효리 등 여자 스타들이 많이 나왔다.

반면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의 경우 박중훈·정우성·원빈·김래원·권상우·이병헌 등 남성 스타들이 광고모델로 나왔다.

하이트맥주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 박지성을 통해 시원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강조했다.

주 소비층이 맥주는 여성이고 소주는 남성인 점을 감안해 각자 이성을 모델로 내세운 것이다. 소주를 마시는 사람을 성별로 나눠보면 남성 비율이 70%로 훨씬 높은 편이다. 여기에 미녀 스타가 모델로 나오면 20대 대학생부터 30대 초반 남성까지 호응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소주 업계는 설명한다.

알코올 도수에서 맥주에 견줘 ‘독주’인 소주의 광고모델인 여성 모델들은 청순한 이미지로 어필해왔다.

물론 최근 소주 광고에 남자가 등장한 경우도 있었다. 두산 ‘처음처럼’이 만화가 허영만을 모델로 기용했다.

두산 쪽은 “영화 <타짜>의 원작자인 허씨는 만화를 영화 등 다른 분야로 개척했다. 부드러운 소주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허씨를 모델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한편, 두산의 ‘처음처럼’이 이효리를 앞세워 내보낸 ‘병째 흔들어 따야 부드러운 술이 된다’는 광고는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을까?

두산 쪽은 “흔들어야 작아진 물 입자 속에 알코올이 스며들어 맛있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로 쪽은 “제조 과정에서 충분히 흔들어 섞었기 때문에 더 흔들어봤자 소용없다”고 반박한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