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 道德經 : 第一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교 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일장

직역

도를 도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규정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는 것으로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가장자리를 본다. 이 양자는 같은 것이나 나와서 이름을 달리 했다. 같은 그 근원을 일러 그윽하다고 하고, 그윽하고 또 그윽하다고 하여 뭇 묘함의 문이다.

해석

도는 바람이다. 느낄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바탕이다. 도화지의 흰 여백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그림이 완성이 되었을 때 여백은 없어진다. 여백이 없는 도화지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 있다. 화가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 그림은 이제 성장을 멈춘다. 고정 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도 그 도화지에는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 비어 있는 것이 바로 바탕이다. 이 바탕의 총체가 도이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차면 여백은 사라지는가? 고민해 보기 바란다.)

도는 현재이다. 현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도를 도라고 규정짓는 것에 반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파를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 말을 음미하라. 늘 그러한 도가 아닐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느 순간에는 규정지은 도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단 그 순간에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약 순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면 노자는 非道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시간의 산물이 아니다. 현재이다. 도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 순간 도는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흘러감이 도이다. 흐르는 강물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순간적인 감정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정된 것을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단지 현재에 자신이 느끼는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도는 과정이다.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내속과 밖에 흐르는 생명력이다. 도는 나이기도 하고 너이가도 한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도는 진리, 근원이라 불리우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진리 근원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것은 편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유재용 이 말은 한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한 인격체는 아니다. 이 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한 인격체를 대변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고정되어 나타나서, 이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실체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름이 실체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다. 책이라는 말은 한글을 아는 사람에게 통용될 뿐이다. 영어로는 book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우리는 책이라는 말에서 책의 의미만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구분 짓지 않음이다.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인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인위가 내재해 있지 않은 것이 하늘과 땅 -우주- 그 자체이다.

이름을 짓는다. 하늘과 땅도 이름이다. 이름이 생기면 사물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의 개체가 구분되어 진다. 틀을 가지지 않은 것에 어떻게 이름을 붙이겠는가. 나와 남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면 남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우주를 틀 지어 볼 때 이름이 생긴다. 이것이 인위이다. 틀 지어 보거나 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의식의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이 우주를 대하면 그 묘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묘하다는 것은 총체의 모습이다. 이 총체에는 나도 들어가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경험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와 우주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묘라고 표현했다.

욕심을 가지고 보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천하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도 우주의 한 부분이다. 아니 우주이다. 완벽하게 우주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우주와 구분 된 것이 있다고 가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자 무명과 유명은 같은 것이다. 우주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물에 이름을 지어서 천지와 만물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 무명과 유명의 근원이 바로 道이다. 이 도는 그윽하고 그윽한 것이다. 뭇 묘함의 문이 되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1.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도는 영구 불변의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구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원이고 유명은 만물의 모체이다.  그러므로 영구 불변의 무에서 만물의 미묘한 이법을 보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영구 불변의 유에서 그 귀착점을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되 그 이름은 다르다. 그 같은 바를 신비로움이라 한다. 신비하고도 신비하여 모든 오묘한 이치가 나오는 문인 것이다.]

  (주) 도: 노자의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만물의 본체요, 궁극적 실체이며,  이법임. 서구인들은 이 도를 way(길), reason(이성, 도리), logos(이성), nature(자연) 등으로 번역하고 있음. 발포르는 도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만물을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도와 만물의 관계를 설명한 일종의 번안이다. 또한 tao, taoism, taoist 등의 표기는 도의 중국어 원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상명: 언제나 변함이 없는 이름. 즉, 연구 불변의 이름을 뜻함.
  묘: 인간의 감각으로는 포착이 불가능한 본체계의 미묘함을 말하는 것임.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도의 본질을 뜻함.
  요: 결말, 끝, 귀착점을 의미함. 도에서 생성된 현상계를 지칭함.
  현: 검다, 신비스럽다, 그윽하다, 불가사의하다, 심원하다 등으로 쓰임.

  해

  노자서 81장 5천여 자의 의미는 이 제1장 59자에 압축되어 있다. 이 장은 노자서의 서론이자 본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제1장의 이해 여부는 노자 사상 전체의 해석에 대한 열쇠가 되고 있다. 노자는 도는 무한하므로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만물의 본체로서 현상의 배후에 스며 있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다. 도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으므로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지각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직관과 신비한 체험에 의해 체득되는 것이다. 도는 천지 만물을 생성, 발전, 소멸시키는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이요, 무차별적 세계이다. 의도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한다는 무위자연이란 표현은 도의 작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도가 만물을 생성케 하는 것은 창조적이라기 보다는 유출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창조주 신화와는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이 제1장에서 동서 철학의 근본 문제인 본체와 현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도에 대한 일원론으로 일관되어 있다. 즉 우주 만물은 도에서 나와서 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 속에서는 자연과 인간, 선과 악, 미와 추 비, 너와 나의 이분법적 발상은 지양되고 있는 것이다. 도의 세계를 직관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대립과 시비와 갈등의 상대적 가치판단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