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속을 걷다/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