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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 장모 vs 서울 사위 ♠
충청도 여자라 속 모르겠는겨? 쓰다 달다 말없다 폭발하는겨?
면전에서 무안 주고 싶지 않아 이리저리 에둘러 말할 뿐인디…
눌변이 달변보다 무서운지라 그 마음 헤아리는 게 사랑이유
"괜찮여. 벨일 없을겨. 너 가졌을 때 아들인 중 알고 산삼을 먹어놔서
자식 중에 니가 젤로 튼튼혔어. 암(癌)은 무슨. 기도나 열심히 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수화기를 내려놓은 명자씨 마음이 서럽다.
악성인지 양성인지는 아직 모른대도, 어쩐지 시커먼 암세포가
딸의 몸에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쪽파를 다듬던 손이 부르르 떨린다.
목에 혹이 하나 있다고 했다.
암인지 아닌지는 목을 열어봐야 알고, 암이면 목을 다시 열어 잘라내야 한단다.
성탄 전야에 딸 소식을 전한 사위는 애써 장모를 위로했다.
"갑상선은 국민 질병이라잖아요. 설령 암이래도 수술하면 완쾌된다니 염려 마세요.
"국민 질병? 명자씨의 심사가 뒤틀린다.
말처럼 튼실했던 내 딸이 시래기죽처럼 허물어진 게 다 누구 탓인디,
여왕처럼 호강시켜 준다고 날름 업어가더니 고생만 바글바글 시킨 게 누군디,
암은 스트레스가 응축된 덩어리라는디, 국민 질병이라니!
불에 얹은 고구마가 타는 줄도 모르고 명자씨는 자신의 우유부단을 책망했다.
키만 멀대같이 크지 딸보다 한 살 덜 먹어
촐랑촐랑 입만 똑똑한 서울 사위가 마음에 찰 리 없었다.
저 좋다는 남자가 최고지 하고 헐값에 딸을 넘긴 게 두고두고 아까웠다.
누구는 그것이 충청도 사람의 치명적 단점이라고 했다.
싫다, 좋다 딱 자르지 못하고 '그려 그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했다가 평생 속병 앓는 거.
얄미운 서울 사위는 한술 더 떴다.
"충청도 여자라 그런지 집사람 속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쓰다 달다 말도 않고 꽁하고 있다가는 느닷없이 폭발한단 말이지요."
오죽하면 착한 내 딸이 폭발하겠느냐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그때도 명자씨는 엉뚱하게 화답했다.
"갸 별명이 곰딴지여. 에려서부터 느리고 앞뒤가 꽉 막혀서는. 흐흐흐."
그럼 또 철없는 사위는 이바구를 이어갔다.
"장모님, 3·1운동이 왜 1919년에 일어난 줄 아세요?
1910년 한일강제병합 된 걸 충청도 사람들이 9년 뒤에 알았기 때문이래요.
우하하! 또 있습니다.
서울 사람이 충청도 시골장에 배추를 사러 갔대요.
'한 포기에 얼마예요?' 물었더니 '알아서 주슈' 하더랍니다.
'얼만지 알아야 드리죠?' 했더니 '있는 만큼 주슈' 하더래요.
그래서 2000원을 내밀었더니 주인이 배추를 막 발로 걷어차면서
'내 이걸 도로 땅에다 묻고 말지' 하고 화를 내더랍니다.
놀란 서울 사람이 얼른 천원짜리 두 장을 더 얹어 4000원을 내밀었더니
그제야 옆에 있던 달랑무를 배추에 얹어 주면서 배시시 웃더라지요."
중학교 교감이었던 장인이 사위를 나무란 건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였다.
"충청에선 면전(面前)에서 무안 주는 걸 상스럽다 여기네.
무 자르듯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만일 누가 '내일 밥 한 끼 먹자'고 했는데 충청도 사람이 '알았다'고 하면
'생각해보겠다'는 것이지, '밥 먹으러 가겠다'는 뜻이 아니네.
부탁을 해도 다짜고짜 안 하네.
이웃에 낫을 빌리러 가면 두어 시간 딴 얘기 하다가 해 저물녘 되어서야
'근디 낫 좀 빌려주면 안 되겄는가?' 하는 것이 충청의 처세네.
언어의 마술사, 위대한 코미디언이 충청에서 왜 많이 나는 줄 아는가.
비유에 능해 그렇다네. 흉도 비유로 보지.
'잔칫집 가서 잘 얻어먹었는가?' 하면
'허연 멀국에 헤엄치겠더구먼'
'장화 신고 들어가 고기를 잡겠더구먼' 할지언정, '먹을 게 없었다'고 직설하지 않네.
누가 세상을 떠나도 '어젯밤 그 양반이 숟가락을 놓으셨디야' '떼 이불 덮으셨디야' 하지,
'세상 버렸다'같이 격 없는 말은 안 하네.
자고로 눌변(訥辯)이 달변(達辯)보다 무서운 법.
내 딸이 도통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겄다고?
설거지할 때 혼자 궁싯대는 소리 들어보게.
복이 있네 없네 하며 죄 없는 걸레를 땅바닥에 패대기치지는 않던가?
자네 살 길이 거기에 있네."
물러터진 고구마를 꾸역꾸역 삼키다 명자씨 목이 멘다.
100세 시대는 개뿔. 마흔이면 미적지근해지고, 쉰이면 쉬어빠지고,
육십이면 으스러지는 게 여자 몸이거늘, 직장 다니랴, 아이 키우랴, 시부모 봉양하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일을 미련퉁이처럼 해낼 적에 말렸어야 했다.
저라고 왜 불평이 없을까마는, 행여 친정 부모 속 끓일까 언제고
'좋다 좋다, 여기는 별일 없다'며 행복에 겨운 척하던 딸이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나 싶은 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사위다.
"깜박했어요, 어머니. 메리 크리스마~스!" 명자씨, 코를 팽 풀고 화답한다.
"그려. 메리스 크리스고, 아기 예수 만만세여.
난 괜찮으니 씰데없이 전화질 하지 말고 우리 딸이나 지성으로 살펴주시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명자씨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내 딸 몸에 티끌만 한 '기스'라도 나면 너는 그날로 끝장인겨. 국물도 없는겨.
[조선일보] [김윤덕의 新줌마병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