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 - 세상의 좋은 이야기들을 모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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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사랑 마음사랑
생의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 중 가장 중요하고 모든 문제의 핵심이 되는 사랑은 아기가 엄마와 나누는 최초의 사랑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최초로 경험하는 안락함, 즐거움, 쾌락, 행복감의 근원이다. 엄마와의 안락한 공생 체험은 사랑의 원형으로 자리잡아 성인이 된 후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짓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나누는 애착경험은 그사람의 정신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된다.
아기는 99% 엄마가 만든다고 한다. 엄마와 아기가 친밀한 애착관계를 맺고 정서적으로 충분히 반응해주면 아기는 정신의 자율성, 창의성을 발현시키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기의 정신 형성에 치명적인 구멍이 생긴다.
우리가 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유는 기대했던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의 감정과 관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노, 우울, 불안, 공포, 중독, 질투, 시기심...... . 그 치명적인 감정들을 뒤집어보면 ‘사랑의 부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도박, 알코올, 마약, 일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의 진정한 욕망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사랑의 행위 속에는 고문이나 외과 수술과 아주 흡사한 것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 때 나는 아주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잘 비유해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 무의식의 서랍을 여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으로 진입하는 순간 내면에 있는 사랑의 원형, 엄마와 나누었던 최초의 사랑이 따라나온다. 동시에 그 시기에 경험했던 분노, 불안, 공포, 좌절, 시기심 같은 감정들도 열린 무의식의 서랍에서 일제히 날아오른다. 그 감정들의 진짜 원인을 모르는 채 우리는 대체로 현실의 연인에게 자기 내면의 분노, 불안, 의심, 질투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위력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때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면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면으로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감정을 넘어서서 계속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랑이 한 사람을 아름답게, 자신감 있게, 성숙하게 만드는 이유 역시 그 어려움을 이겨낸 성과일 것이다. 사랑만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인간 정신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한다.
2. 무의식, 자아실현과 용기
무의식이라는 용어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는 정의하는 바가 다르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최초에 자아의식이 있고 그것을 억압당함으로써 무의식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생존에 위험하거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생각, 감정, 욕망 등이 숨겨지거나 떨어져나가 쌓인 부산물 같은 것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융은 무의식을 인격형성의 모체라고 보았다. 최초에 넓고 깊은 바다 같은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에서 자아의식이 싹터 차츰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영토를 넓혀간다고 보았다. 대신 융은 의식에서 떨어져나가 억압된다는 프로이트식 무의식에는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콤플렉스 등의 이름을 붙였다.
용어야 어떻든, 학파간에 주장하는 무의식의 엄밀한 의미가 무엇이든 한 개인의 내면에는 이질적이고 독립된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생의 비밀을 더 많이 쥐고 있으며, 아주 힘이 세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었다.
우리 삶의 중요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비밀 한 가지는 우리 대부분이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여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식을 토대로 하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인간 정신이 생후 3년에 이르기까지 60퍼센트, 여섯 살까지 95% 형성된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다섯 살까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신분석을 받은 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얼마나 정확하게 인간 정신을 설명하는 말인가 싶어 놀란 적이 있다.
‘자기의 심리학’을 주창한 제임스 F. 매스터슨이라는 이는 [참자기]라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어머니도 없고 완벽한 자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자기가 생겨나서 독특하고 자율적인 자기에 통합되기 시작하는 생후 첫 3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이 어린 시절의 사소했던 갈등의 잔재 때문이고 그 결과 창조성과 자율성, 성적 친밀감에서 경미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에서는 개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직면하는 의식 속에 통합하는 방법을 쓴다. 분석치료에서 ‘무의식을 의식 속에 통합한다.’는 말을 상담심리학에서는 성인 아이, 내재 과거아라는 불리는 바로 그 ‘내면의 아기를 성인이 된 자신이 보살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자기실현은 억압이나 회피방어를 벗고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 한다. 본성의 자기와 만날 때에야 지혜와 통찰의 순간이 찾아온다. 프로이트 학파가 창조성을 승화라고 정의하는 데 반해 융은 다르게 설명한다. 융에 의하면 창조적 재능이란 이미 우리의 무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부적 영역이며, 창조성이 발현되는 행위는 우리의 자아가 그 창조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롤로 메이의 연구처럼, 고흐는 서른세 살 이전에 창조성을 빠르게 소진시킨 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피카소 같은 이는 아흔 살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꾸준히 왕성한 창조성을 보인다. 피카소의 창조성은 융이 말한 대로 무의식의 거대한 영역을 저항이나 억압 없이 자아가 수용한 데서 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내면의 어두운 욕망과도 소통했으며, 부정적 자아들도 그냥 내보냈고, 그 모든 국면들이 인간임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이 나를 이끌어왔다.”는 말은 그가 창조성의 근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용기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안은 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능력이라고 한다. 홀로 존재하는 용기, 내면과 직면하는 용기, 선을 지키는 용기 등 우리 생의 각 국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다면 사랑은 단순한 의존상태가 되고 용기가 없다면 충성심은 획일주의가 되고 만다. 용기는 일체의 정신적인 덕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고 한다.
3. 공감, 인정지지
공감능력은 인간 감정의 다채로운 영역에 대해 세밀하게 체험한 위에서 획득되는 능력일 것이다. 내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타인의 분노에 대해서도 헤아려볼 수 없다. 내 마음의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면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만 타인의 그런 감정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입은 자가 치유한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모든 종교 지도자나 신화 속 주인공이 왜 반드시 고난과 순교의 시간을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확한 명제일 것이다.
공감은 연민이나 동감과도 구분되는 감정이라고 한다. 연민은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 감정이고, 동감은 객관적 태도를 잃고 상대방에게 휩쓸리기 쉬운 감정이다. 반면 공감은 중립적이고 비판단적인 태도로 상대방의 내면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는 것이라 한다. 한 인간의 비통, 애착, 공포, 분노...... . 그리하여 인간이 그토록 나약하고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는 상태이다.
인정과 지지 역시 공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인정과 지지이다. 인정과 지지는 존재의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이고, 가끔 무너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지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 정신치료]라는 책에 의하면 ‘지지’란 모든 형태의 정신 치료의 중요한 요소이며, 카운슬러에게 필요한 기능이라고 한다. 지지는 판단하는 마음 없이 타인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 충고하고자 하는 마음을 누른 채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지지의 태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으면 타인의 칭찬에 그토록 들뜨거나, 외부의 비판에 그토록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자기중심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에 고요히 머물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도 잠시 머물 수 있다”
2005년 4월 5일 나무 심는 날에
김형경 님의 여행/에세이 [사람 풍경] 중에서
생의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 중 가장 중요하고 모든 문제의 핵심이 되는 사랑은 아기가 엄마와 나누는 최초의 사랑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최초로 경험하는 안락함, 즐거움, 쾌락, 행복감의 근원이다. 엄마와의 안락한 공생 체험은 사랑의 원형으로 자리잡아 성인이 된 후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짓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나누는 애착경험은 그사람의 정신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된다.
아기는 99% 엄마가 만든다고 한다. 엄마와 아기가 친밀한 애착관계를 맺고 정서적으로 충분히 반응해주면 아기는 정신의 자율성, 창의성을 발현시키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기의 정신 형성에 치명적인 구멍이 생긴다.
우리가 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유는 기대했던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의 감정과 관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노, 우울, 불안, 공포, 중독, 질투, 시기심...... . 그 치명적인 감정들을 뒤집어보면 ‘사랑의 부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도박, 알코올, 마약, 일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의 진정한 욕망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사랑의 행위 속에는 고문이나 외과 수술과 아주 흡사한 것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 때 나는 아주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잘 비유해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 무의식의 서랍을 여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으로 진입하는 순간 내면에 있는 사랑의 원형, 엄마와 나누었던 최초의 사랑이 따라나온다. 동시에 그 시기에 경험했던 분노, 불안, 공포, 좌절, 시기심 같은 감정들도 열린 무의식의 서랍에서 일제히 날아오른다. 그 감정들의 진짜 원인을 모르는 채 우리는 대체로 현실의 연인에게 자기 내면의 분노, 불안, 의심, 질투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위력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때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면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면으로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감정을 넘어서서 계속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랑이 한 사람을 아름답게, 자신감 있게, 성숙하게 만드는 이유 역시 그 어려움을 이겨낸 성과일 것이다. 사랑만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인간 정신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한다.
2. 무의식, 자아실현과 용기
무의식이라는 용어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는 정의하는 바가 다르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최초에 자아의식이 있고 그것을 억압당함으로써 무의식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생존에 위험하거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생각, 감정, 욕망 등이 숨겨지거나 떨어져나가 쌓인 부산물 같은 것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융은 무의식을 인격형성의 모체라고 보았다. 최초에 넓고 깊은 바다 같은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에서 자아의식이 싹터 차츰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영토를 넓혀간다고 보았다. 대신 융은 의식에서 떨어져나가 억압된다는 프로이트식 무의식에는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콤플렉스 등의 이름을 붙였다.
용어야 어떻든, 학파간에 주장하는 무의식의 엄밀한 의미가 무엇이든 한 개인의 내면에는 이질적이고 독립된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생의 비밀을 더 많이 쥐고 있으며, 아주 힘이 세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었다.
우리 삶의 중요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비밀 한 가지는 우리 대부분이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여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식을 토대로 하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인간 정신이 생후 3년에 이르기까지 60퍼센트, 여섯 살까지 95% 형성된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다섯 살까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신분석을 받은 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얼마나 정확하게 인간 정신을 설명하는 말인가 싶어 놀란 적이 있다.
‘자기의 심리학’을 주창한 제임스 F. 매스터슨이라는 이는 [참자기]라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어머니도 없고 완벽한 자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자기가 생겨나서 독특하고 자율적인 자기에 통합되기 시작하는 생후 첫 3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이 어린 시절의 사소했던 갈등의 잔재 때문이고 그 결과 창조성과 자율성, 성적 친밀감에서 경미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에서는 개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직면하는 의식 속에 통합하는 방법을 쓴다. 분석치료에서 ‘무의식을 의식 속에 통합한다.’는 말을 상담심리학에서는 성인 아이, 내재 과거아라는 불리는 바로 그 ‘내면의 아기를 성인이 된 자신이 보살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자기실현은 억압이나 회피방어를 벗고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 한다. 본성의 자기와 만날 때에야 지혜와 통찰의 순간이 찾아온다. 프로이트 학파가 창조성을 승화라고 정의하는 데 반해 융은 다르게 설명한다. 융에 의하면 창조적 재능이란 이미 우리의 무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천부적 영역이며, 창조성이 발현되는 행위는 우리의 자아가 그 창조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롤로 메이의 연구처럼, 고흐는 서른세 살 이전에 창조성을 빠르게 소진시킨 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피카소 같은 이는 아흔 살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꾸준히 왕성한 창조성을 보인다. 피카소의 창조성은 융이 말한 대로 무의식의 거대한 영역을 저항이나 억압 없이 자아가 수용한 데서 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내면의 어두운 욕망과도 소통했으며, 부정적 자아들도 그냥 내보냈고, 그 모든 국면들이 인간임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이 나를 이끌어왔다.”는 말은 그가 창조성의 근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용기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안은 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능력이라고 한다. 홀로 존재하는 용기, 내면과 직면하는 용기, 선을 지키는 용기 등 우리 생의 각 국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다면 사랑은 단순한 의존상태가 되고 용기가 없다면 충성심은 획일주의가 되고 만다. 용기는 일체의 정신적인 덕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고 한다.
3. 공감, 인정지지
공감능력은 인간 감정의 다채로운 영역에 대해 세밀하게 체험한 위에서 획득되는 능력일 것이다. 내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타인의 분노에 대해서도 헤아려볼 수 없다. 내 마음의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면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만 타인의 그런 감정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입은 자가 치유한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모든 종교 지도자나 신화 속 주인공이 왜 반드시 고난과 순교의 시간을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확한 명제일 것이다.
공감은 연민이나 동감과도 구분되는 감정이라고 한다. 연민은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전제로 한 감정이고, 동감은 객관적 태도를 잃고 상대방에게 휩쓸리기 쉬운 감정이다. 반면 공감은 중립적이고 비판단적인 태도로 상대방의 내면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는 것이라 한다. 한 인간의 비통, 애착, 공포, 분노...... . 그리하여 인간이 그토록 나약하고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는 상태이다.
인정과 지지 역시 공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인정과 지지이다. 인정과 지지는 존재의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이고, 가끔 무너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지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 정신치료]라는 책에 의하면 ‘지지’란 모든 형태의 정신 치료의 중요한 요소이며, 카운슬러에게 필요한 기능이라고 한다. 지지는 판단하는 마음 없이 타인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 충고하고자 하는 마음을 누른 채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지지의 태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으면 타인의 칭찬에 그토록 들뜨거나, 외부의 비판에 그토록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자기중심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에 고요히 머물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도 잠시 머물 수 있다”
2005년 4월 5일 나무 심는 날에
김형경 님의 여행/에세이 [사람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