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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나에게 무엇인가? 조국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기에 우리 선조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소중한 목숨을 바쳤는가? 사실 편안한 시절은 나라가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저 그 땅에서 땅갈아 농사짓고, 직장다니고, 자식낳아 기르고, 부모모시고 편안히 살 때는 조국, 민족 이러한 것들에 대해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외국을 다니거나, 외국에서 생활하거나, 나라를 잃었거나,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거나 할 때는 조국의 소중함을 느끼거나 설사 느끼지 못하더라도 의무감 때문에 나서게 된다. 보라! 김구선생이 당신에게 3가지 소원이 있는데, 첫째도 대한의 독립이요, 둘째도 대한의 독립이요, 셋째도 대한의 독립이라고 하셨던 말씀을... 얼마나 나라없는 설움이 컸으면 당신의 3가지 소원이 모두 대한의 독립이란 말이던가?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우리의 산수자연에서 낚시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산천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조국이 있음에, 그것도 독립하여 동족상잔의 동란을 겪은 전쟁의 폐허위에서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 세계 경제10위 남짓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위대한 조국임을 다시 한번 감사드려야 한다. 나라를 찾고, 나라를 지켜내신 우리 조상님들께도 아울러 거듭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육유(陸游)(1125년∼1210년)는 중국의 대표적인 애국시인이다. 중국에서는 3대 애국시인으로 굴원(屈原),두보(杜甫),육유를 말하지만, 육유는 이들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죽을 때까지 조국의 수복을 원했던 인물이다. 아시다시피 송은 金나라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남송으로 부르는 치욕적인 역사를 시작하지만, 조정은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여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하였고, 육유는 신기질(辛棄疾) 등과 함께 끝까지 조국의 수복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비분강개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조국에 대한 남다른 열정만은 애국시인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만 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저녁에 보니 太白이 빛을 거둬들이는데, 나라에 보답하여 죽으려 해도 전쟁터가 없네.(夜視太白收光芒, 報國欲死無戰場)”(<隴頭水>)라고 한 것처럼, 南宋 조정은 연약하고 무능하며, 조정의 정책은 욕됨을 찾아가면서 안전을 도모하였기에, 시인의 이상을 없애버렸다. 끝내 시인이 나라를 위해 보답하고 원수를 갚으려는 의욕은 한낱 꿈속의 일처럼 희망이 없어 걱정만 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누워 들으니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철마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소리로 생각하며 꿈속에 빠져드네(夜闌臥聽風吹雨, 鐵馬冰河入夢來)”,“(임금의 군대가 북쪽을 정벌하여 중원을 되찾는 날, 집안에서는 잊지 말고 제사하여 나에게 알려주길.(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마음 속 백만 군사를 저버리고, 마음을 의지할 것 없어 시로써 외치네. 누가 가련타하는가? 나라사랑하는 천갈래의 눈물을, 북쪽땅의 먼지를 말하다보니 마음을 평안하지 않고(辜負胸中百萬兵, 百無聊賴以詩鳴. 誰憐愛國千行淚, 說到胡塵意不平.)(梁啓超<讀陸放翁集>)”… 시인의 바램은 오로지 金나라와 전쟁을 벌여 다시 조국을 찾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식들에게 조국이 수복되는 날 잊지말고 제사하여 알려주라고 했겠는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 소원이라고 하셨던 김구선생의 마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순희(淳熙)10년(1183년)에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의 ‘종묘(祠祿)’에 관해서는 일체 간여하지 않았다. 시인의 눈은 거울같은 호수를 향했는데, 무성한 수목, 쓸쓸히 떠있는 부들과 갈대, 백로가 날아가고, 아름다운 물고기가 튀어오르고, 푸른 물은 푸른 하늘을 비추고, 시원한 바람은 호수를 뒤흔들어놓고, 어부들은 도롱이에 삿갓쓰고, 조그만 배에 앉아있고, 또 거울같은 호수가에서는 거친 漁歌를 부르며 자유자재로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시인은 낚시가 하고 싶어졌다. 낚시를 위해 시인은 특별히 도롱이 한 벌을 사서, 스스로 ‘아주 기묘하다(甚妙)’고 하고, 즉흥시 <橫塘>을 써서 말했다. “…농사 일에 점점 흥이 생겨 들판에 사람 가득, 차가운 첫 서리가 너무 심해 기러기는 하늘을 날아가고…새로 이끼 색 푸른 도롱이 한 벌을 새로 사니, 이생은 막 어부가 거의 된 듯 하네.(農事漸興人滿野, 寒霜初重雁橫空…新買一簑苔鮮綠, 此生端欲伴漁翁.)” 시인은 본래 “말에 올라서는 미친 오랑캐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리면 軍書를 쓰며(上馬擊狂胡, 下馬草軍書.)”(<觀大散關圖有感>), 적을 죽이고 나라를 회복하는 전쟁터에서 노력하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다만 漁翁과 짝을 하며 낚시를 하고 있다니! 漁翁과 낚시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적이 강산을 점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토수복을 그토록 외치던 시인이 낚시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그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이로부터 우리들은 浙江 山陰(지금의 紹興)의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의 鏡湖가에서, 맑은 물이 돌아흐르는 曹娥江 상류의 기슭에서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한 늙은‘漁翁’을 본다. 햇살이 찬란하게 빛날 때는 삿갓을 쓰고, 안개비가 촉촉이 내릴 때면 도롱이를 입고, 침착하고 느긋하게 낚시를 던져 낚시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손은 낚시대를 꽉 잡는다. 만약 불타는 눈길이 찌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찌기 움직여, 아래로 들어가거나 위로 솟구치면 시인은 갑자기 낚시대를 나꿔채고, 금빛 잉어 한 마리를 낚는다! 고기는 살아서 바둥거리고, 시인의 얼굴엔 즐거운 미소가 번진다! 이해에 시인은 <北渚>시 속에서 다시 한번 가을낚시를 묘사했다. 北渚露濃平葉老(불저로농평엽로), 북쪽 물가 이슬이 탱글해지니 보통 잎사귀 시들어 버리고, 南塘雨過藕花稀(남당우과우화희). 남쪽 둑방 비가 지나가니 연잎사귀 드물어졌네. 新秋漸近蟬更急(신추점근선경급), 새로 가을이 점점 가까워 매미소리는 더욱 요란하고, 殘日已沈鴉未歸(잔일이침아미귀), 스러져가는 해는 이미 졌는데 갈가마귀는 돌아가지 않고. 銅鏡面顔無藥駐(동경면안무약주), 구리거울에 비친 얼굴 근심으로 인해 약도 효험없고, 玉關勳業與心違(옥관동업여심위). 변경에서 세우려는 공훈 이미 마음과 어긋나네. 一簑一笠生涯在(일사일립생애재), 도롱이 하나 삿갓 하나 이러한 생활 속에 있으니, 且醉蒼苔歸釣磯(차취창태귀조기). 또한 푸른 이끼낀 바위에서 취하여 낚시터로 돌아가네. 첫째연은 남송의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북쪽엔 이슬이 내리듯 금나라가 침략하여 모든 것은 시들어버렸고, 남쪽의 송나라의 상황은 비가 지나듯 주변파와 화친파의 논쟁이 일더니만 이젠 연잎이 없어지듯 희망이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연도 가을을 알리는 매미소리는 더욱 시끄럽다. 얼마남지 않은 더위조차 태워버릴 것처럼 울어대는 매미소리야말로 처절한 시인의 절규가 아닌가? 해는 이미졌는데, 죽거나 상한 음식을 찾아다니는 갈가마귀조차 옛 고향으로 돌아가질 못하는 형국이다. 셋째연은 이미 희망도 없어진 상황이라 그의 모습은 까칠하여 병자의 모습이고, 변경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던 시인의 바램은 이미 물건너 간 일로, 작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넷째연은 그러므로 낚시를 하고 있는 들 무슨 낙이 있을 것이며, 다른 일은 더욱 고통과 근심만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낚시터를 찾지만 오직 술로써 세월을 낚는 것뿐. 같은 해에 쓴 <추흥>에서도 비슷한 정조로 읊고 있다. 白髮蕭蕭欲滿頭(백발소소욕만두), 백발이 쓸쓸히 온 머리를 뒤덮으려 하고, 歸來三見故山秋(귀래삼견고산추). 고향으로 돌아와서 옛 산의 가을 모습을 세 번이나 보았네. 醉凭高閣乾坤迮(취빙고각건곤책), 높은 누각에 취하니 乾坤이 닥쳐오고, 病入中年日月遒(병입중년일월주). 중년에 병이드니 일월만 다가오네. 百戰鐵衣空許國(백전철의공허국), 수많은 전장의 갑옷은 나라를 위해 힘썼는데, 三更畵角只生愁(삼경화각지생수). 三更에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근심이 생기네. 明朝煙雨桐江岸(명조연우동강안), 맑은 아침의 안개와 비는 桐江 기슭에 머물고, 且占丹楓繫釣舟(차점단풍계조주). 잠시 그곳을 차지한 단풍에 낚시배를 매어보네. 백발이 온 머리를 뒤덮으려 하고, 몸도 좋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이미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고향의 가을 산수는 여전히 아름답다. 높은 누각에 올라 술잔을 잡고 북쪽을 바라보지만 건곤(乾坤)이 누가 차지했는 지 모르고, 갑옷을 입고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다니던 큰 바램은 헛된 약속이 되었다. 저녁이 깊어져, 전해오는 나팔 소리는 오히려 열혈남아를 불러모아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기에 이로부터 새로운 근심이 더해간다. 다음날 아침에 엄광(嚴光)을 배워 안개비가 뒤덮힌 동려(桐廬) 부춘강(富春江) 변의 낙엽이 이미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조그만 배를 묶고 낚시를 한다. 나라를 보답하려도 방법이 없고, 시인은 다만 애국의 아픔을 낚시에 가만히 기탁하였고, 기왕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를 수 없으면 낚싯줄을 드리우고 낚시를 던지는 것이다! 다시 <작교선(鵲橋仙)>를 보면 당시 시인의 마음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술꾼들은 하나하나 封侯를 얻었고, 홀로 내침을 당해 강변의 漁父가 되었네.…당시 사람은 나를 엄광에 잘못 비유하지만, 나는 이로부터 무의 어부라네.(……酒徒一一取封侯, 獨去作江邊漁父.…時人錯把比嚴光, 我自是, 無名漁父.)” 다만 술마시며 즐기고 구차하게 안전을 도모한 사람들은 모두 봉후를 얻었고, 자신은 항전에 뜻을 가졌지만 오히려 조정에서 내침을 당해 다만 홀로 강변의 漁父가 될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한 嚴子陵에 비유하니, 시인의 속이 어떻겠는가?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조정의 입장에서는 육유의 지나친 주전론은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 금나라와 비교하면 전쟁에서 이길 승산은 없고, 그렇다고 남쪽으로 도망 온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태평성대와 같이 편안한데, 굳지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전쟁을 치르겠는가? 오매불망 국토를 수복하자고 주장하는 육유의 외침은 오히려 조정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낚시터에서 아무리 술을 마시고 고함을 지르며, 신세를 한탄하고, 조정을 원망한들 여론을 형성하게 되겠는가? 텅빈 물가에서 낚시하는 것이야말로 조정이 바라던 것이다. 그래서 陸游는 순희(淳熙)13년에 ‘돌아와 옛 산의 가을을 세 번이나 보내고’ 또 ‘잠시 단풍이 자리잡은 곳에 낚시배를 맨’ 뒤에는, 곧 조정에서 명을 내려, 그를 嚴州(지금의 浙江省 建德 동북)의 지주(知州)로 보냈는데, 이때 효종(孝宗)이 특별히 “嚴陵은 산수가 뛰어나고 관직도 한가롭고 시를 읊으며 자적할 수 있소(嚴陵, 山水勝處, 職事之暇, 可以賦咏自適)”(蘇州市敎硏室編<陸游年表>)라고 하였다. 보라, ‘관직이 한가로와’ 그로 하여금 시를 읊고 자적하게 했으니, 그를 불러 조급하게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마음은 아예 없었다. 陸游가 그곳에서 낚시한 것은 실제로 시인이 나라에 보답할 길을 막는 조정의 계획이며, 이에 어쩔 수 없이 응하는 시인의 마음이야 오죽 아프겠는가? 바로 시인의 낚시는 잃어버린 조국의 산하를 수복하지도 못하고, 낚시터를 전전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일뿐 만 아니라, 조상에 대한 죄인이요, 후손에 대한 부끄러운 선배로써 드러내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요, 우울한 속마음에 대한 발설이다. 결과적으로, 남송나라는 국토를 수복하지 못하고 원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으니, 낚시터에서 그토록 원하던 陸游의 바램이 부족했던 것인가? 아! 우리의 통일은 생전에 볼 수 있을까? 낚시대 한번 던질 때마다 조국통일을 빌어봐야지. | |||||||
[데일리안 경기 강경범 생활문화칼럼니스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