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샘터 - 팍팍한 삶, 잠시 쉬어 가는 공간
글 수 494
1970년대 학창 시절 여름 처음 기차를 탔다. 정읍에서 용산역까지 가는 완행열차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새벽밥을 먹고 집을 출발, 목적지까지 도착하면 해가 저물었다. 낙엽이 지는 가을, 석양에 평야를 가로지르는 완행열차를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익산에 내렸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이리역 폭발 사고가 터진 날은 대학예비고사를 보던 날이다. 예비고사를 포기한 날, 허전함에 내장산을 가기로 했었다. 친구와 함께 떠나던 여행길의 차창 밖 풍경은 외롭고 쓸쓸했다. 가을철마다 시작되는 지독한 가슴앓이가 그때부터 도진 것이었다. 가을은 남자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비 내리는 호남선>, <대전발 0시 50분>, <녹슬은 기찻길> 노래는 형님의 애창곡이었다. 기차가 등장하는 노랫말은 이별이 소재가 된 노래다. <홀로 가는 길> 노래는 돌아가신 형님의 그리울 때 부르는 노래였다. “나는 떠나고 싶다. 이름 모를 머나먼 곳에, 아무런 약속 없이 떠나고픈 마음 따라 나는 가고 싶다. 나는 떠나가야 해. 가슴에 그리움 갖고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가슴 아픔 없을 곳에 나는 떠나야 해. 나를 떠나간 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떠날 순 없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말 없이 차마 떠나가리라. 사랑도 이별도 모두가 지난 얘긴걸…….”
군복 입은 채 응시한 예비고사 합격도 등록금이 문제였다. 대학 등록금을 돌아가신 형님이 축협조합장이신 김사중 선배의 어머님 조문금에서 빌려 오셨다. 전주와 군산에 오가던 통학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학생증을 보이면 요금이 할인되던 시기에 삼례와 익산, 춘포와 대야를 거쳐 군산역까지 가던 열차 속은 장터 같았다. 농산물을 팔러 가는 사람과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로 완행열차 안이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가을이면 떠오르는 추억 따라 간이역을 돌아보았다.
군산선은 익산에서 군산항까지 연결된 1912년 개설된 철도이다. 일본인 호소카와, 에토, 가와사키 농장 등에서 쌀을 실어 나르던 철도였다. 기차에 대한 이별 노래는 배고픔의 설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진지 잡수셨어요?”란 독특한 인사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내용이란다. 곡창의 평야에서 끼니를 걱정하던 고달픈 선조들의 아픔이 드러난 인사말이 서글프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했던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호남평야는 수탈의 곡창지대였다. 1914년 이리와 여수를 연결한 전라선도 따지고 보면 쌀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였다. 슬픈 역사를 지켜본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사이다. 1936년 유럽 르네상스 건축과 일본 가옥의 절충식 건물인 임피역사를 돌아보았다. 전라선 복선화로 폐역사가 된 춘포역은 목조시멘트 벽체 일본식 단층 건물 그대로 보존되었다. 전국 체전 기간이라서 역사 주변은 익산으로 통학하던 지역민의 흑백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 속 1960년대 인물들은 70대 고령이 된 사람들이다. 고향 마을의 허름한 주택들처럼 춘포와 임피역 주변에도 폐가들이 눈에 띄었다. 사라져간 농가들처럼 예전에 보았던 마을 사람들도 사라져 갔다.
가난했던 초가집의 어린 시절도 가슴이 아리다. 목이 메인 이별가는 사람과의 이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3·1운동이 벌어진 해에 일제의 양곡 수탈에 항거한 욕구 농민들의 저항을 소설로 쓴 채만식 작가의 고향은 ‘임피’다. 임피역사 안에는 실물 같은 조형물들이 공간을 지키고 있다. 남부여대 장꾼과 학생, 검표원 제복과 승차권을 천공하던 가위도 반가웠다. 대야로 가던 길에, 임피라는 지명은 평야 지역의 제방을 막은 ‘방죽에 다다르다’에서 유래되었다고 선배에게 들었다. ‘대장촌’이라 부르던 춘포, ‘동산촌’은 원래 삼례라는 지명을 일제 강점기에 만든 ‘신작로’처럼 새로 생긴 일본식 지명이다.
전시관으로 세워둔 통학열차에 올라갔다. 정차한 객실 안에 승객들이 실물처럼 앉아 있어 깜짝 놀랐다. 타임머신 같은 공간이었다. 탑동을 지나서 이제는 옛날 도로로 변신한 전군 가도에 올랐다. 번영로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벚꽃 가로수가 고목으로 변하였다. 지난 세월 속에 신작로의 역사를 지켜보던 나무들도 가지가 찢긴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날개 꺾인 새처럼 축 처진 가지가 힘겨운 듯하고, 검은 표피도 부스럼딱지 같아 보였다. 도로 관리도 포기했는지 누더기가 된 4차선 도로에서 승용차도 터덜거렸다.
호남평야 가득한 누런 벼들도 차마 보지 못하여 고개를 숙인 듯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윤회를 생각할까? 아니면 가장 뜨거웠던 지난여름에 대한 아쉬움일까. 언제부턴가 승용차와 고속버스, KTX와 항공기 등 빠른 운송 수단에 길들여졌다. 바람처럼 스며드는 나이 탓인지 가을이 되면 허전한 마음에 추억 속에 사라진 완행열차가 그리웠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라져간 차창 밖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한숨 쉬던 그때가 그리웠다. 나는 홀로 떠나야만 한다. 낙엽처럼 사라진 지난 시절이 그리워졌다. 종착역을 향하는 인생 열차는 완행열차처럼 천천히 달렸으면 좋겠다.
글출처 : 아버지의 뒷모습(이준구 수필집, 수필과비평사)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익산에 내렸던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이리역 폭발 사고가 터진 날은 대학예비고사를 보던 날이다. 예비고사를 포기한 날, 허전함에 내장산을 가기로 했었다. 친구와 함께 떠나던 여행길의 차창 밖 풍경은 외롭고 쓸쓸했다. 가을철마다 시작되는 지독한 가슴앓이가 그때부터 도진 것이었다. 가을은 남자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비 내리는 호남선>, <대전발 0시 50분>, <녹슬은 기찻길> 노래는 형님의 애창곡이었다. 기차가 등장하는 노랫말은 이별이 소재가 된 노래다. <홀로 가는 길> 노래는 돌아가신 형님의 그리울 때 부르는 노래였다. “나는 떠나고 싶다. 이름 모를 머나먼 곳에, 아무런 약속 없이 떠나고픈 마음 따라 나는 가고 싶다. 나는 떠나가야 해. 가슴에 그리움 갖고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가슴 아픔 없을 곳에 나는 떠나야 해. 나를 떠나간 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떠날 순 없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말 없이 차마 떠나가리라. 사랑도 이별도 모두가 지난 얘긴걸…….”
군복 입은 채 응시한 예비고사 합격도 등록금이 문제였다. 대학 등록금을 돌아가신 형님이 축협조합장이신 김사중 선배의 어머님 조문금에서 빌려 오셨다. 전주와 군산에 오가던 통학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학생증을 보이면 요금이 할인되던 시기에 삼례와 익산, 춘포와 대야를 거쳐 군산역까지 가던 열차 속은 장터 같았다. 농산물을 팔러 가는 사람과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로 완행열차 안이 북적거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가을이면 떠오르는 추억 따라 간이역을 돌아보았다.
군산선은 익산에서 군산항까지 연결된 1912년 개설된 철도이다. 일본인 호소카와, 에토, 가와사키 농장 등에서 쌀을 실어 나르던 철도였다. 기차에 대한 이별 노래는 배고픔의 설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진지 잡수셨어요?”란 독특한 인사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내용이란다. 곡창의 평야에서 끼니를 걱정하던 고달픈 선조들의 아픔이 드러난 인사말이 서글프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했던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호남평야는 수탈의 곡창지대였다. 1914년 이리와 여수를 연결한 전라선도 따지고 보면 쌀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였다. 슬픈 역사를 지켜본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사이다. 1936년 유럽 르네상스 건축과 일본 가옥의 절충식 건물인 임피역사를 돌아보았다. 전라선 복선화로 폐역사가 된 춘포역은 목조시멘트 벽체 일본식 단층 건물 그대로 보존되었다. 전국 체전 기간이라서 역사 주변은 익산으로 통학하던 지역민의 흑백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 속 1960년대 인물들은 70대 고령이 된 사람들이다. 고향 마을의 허름한 주택들처럼 춘포와 임피역 주변에도 폐가들이 눈에 띄었다. 사라져간 농가들처럼 예전에 보았던 마을 사람들도 사라져 갔다.
가난했던 초가집의 어린 시절도 가슴이 아리다. 목이 메인 이별가는 사람과의 이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3·1운동이 벌어진 해에 일제의 양곡 수탈에 항거한 욕구 농민들의 저항을 소설로 쓴 채만식 작가의 고향은 ‘임피’다. 임피역사 안에는 실물 같은 조형물들이 공간을 지키고 있다. 남부여대 장꾼과 학생, 검표원 제복과 승차권을 천공하던 가위도 반가웠다. 대야로 가던 길에, 임피라는 지명은 평야 지역의 제방을 막은 ‘방죽에 다다르다’에서 유래되었다고 선배에게 들었다. ‘대장촌’이라 부르던 춘포, ‘동산촌’은 원래 삼례라는 지명을 일제 강점기에 만든 ‘신작로’처럼 새로 생긴 일본식 지명이다.
전시관으로 세워둔 통학열차에 올라갔다. 정차한 객실 안에 승객들이 실물처럼 앉아 있어 깜짝 놀랐다. 타임머신 같은 공간이었다. 탑동을 지나서 이제는 옛날 도로로 변신한 전군 가도에 올랐다. 번영로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벚꽃 가로수가 고목으로 변하였다. 지난 세월 속에 신작로의 역사를 지켜보던 나무들도 가지가 찢긴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날개 꺾인 새처럼 축 처진 가지가 힘겨운 듯하고, 검은 표피도 부스럼딱지 같아 보였다. 도로 관리도 포기했는지 누더기가 된 4차선 도로에서 승용차도 터덜거렸다.
호남평야 가득한 누런 벼들도 차마 보지 못하여 고개를 숙인 듯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윤회를 생각할까? 아니면 가장 뜨거웠던 지난여름에 대한 아쉬움일까. 언제부턴가 승용차와 고속버스, KTX와 항공기 등 빠른 운송 수단에 길들여졌다. 바람처럼 스며드는 나이 탓인지 가을이 되면 허전한 마음에 추억 속에 사라진 완행열차가 그리웠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라져간 차창 밖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한숨 쉬던 그때가 그리웠다. 나는 홀로 떠나야만 한다. 낙엽처럼 사라진 지난 시절이 그리워졌다. 종착역을 향하는 인생 열차는 완행열차처럼 천천히 달렸으면 좋겠다.
글출처 : 아버지의 뒷모습(이준구 수필집, 수필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