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독주회 무대에는 피아니스트만 오르지 않는다.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서 연주를 할 때, 바로 옆에 앉아, 그림자처럼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악보를 넘겨주는 그 사람을 ‘페이지 터너’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느니 데르쿠르(Denis Dercourt)의 <페이지 터너>라는 영화가 기억난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가던 멜라니는 심사위원장 아리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연주를 망치게 된다. 10년이 지난 뒤 멜라니는 아리안의 페이지 터너가 되어 결정적인 순간 그를 몰락시킨다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감독 드니 데르쿠르는 실제로 음악학교 교수였고, 영화 속의 아리안처럼 심사위원을 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무대 위에는 빛나는 피아니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페이지 터너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페이지 터너’의 역할을 ‘일종의 자기 소멸’이라고 규정했다.
페이지 터너가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이 있다.
화려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악보를 넘길 때 연주자를 건드리거나 가리면 안 된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악보를 넘겨주어야 하며,
악보를 넘길 때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이 많은 직업은 쓸쓸하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악보를 넘기는 사람이 연주 전체를 망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페이지 터너가 없으면 연주를 하지 못하는 피아니스트도 있다고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
드러나지 않으나 아주 중요한 사람.
주목받지 못하지만
때론 어떤 일의 성태를 좌우하는 사람.

페이지 터너가 같은 존재들이 우리 곁에도 있다.
어쩌면 우리 역시 페이지 터너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모를 일.
세상을 위해 애써주는 그림자 같은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잊고 지내는 존재.

이 세상의 페이지 터너들에게,
정중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

글출처 : 그 말이 내게로 왔다(김미라의 감성사전, 책읽는수요일)


배경음악 : Stranger / Fariborz Lach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