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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살갑다.
얇은 가운처럼 서리를 입던 장미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줄기 옆으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작아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타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둥치와 가지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
나도 모르게 코트의 가슴에 손이 간다.